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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전쟁
박종진 2023년 06월 09일 (금) 01:42:45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친한 친구 아버지가 중동에 다녀오시면서 친구에게는 노란 미제 연필을, 가장 큰형에게는 만년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는 그 형 몰래 그 만년필을 보여 주기로 했는데, 짙은 청색에 금색 화살 클립과 참새 부리 같은 펜촉이 달린 파커45였습니다. 두근두근했습니다. 친구 형은 동네 짱이었고, 걸리면 친구와 저는 코피가 날 때까지 하루 종일 권투를 해야 하는, 당시엔 목숨을 걸어야 할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친구는 유난히 눈동자가 새까맣고 커다랬는데, 불안함이 가득했던 그 커다란 눈동자는 지금도 또렷합니다. 제 손도 벌벌 덜덜 떨렸지만, 종이에 펜촉이 닿는 순간 모든 걱정과 불안은 새처럼 훨훨 날아가 버렸습니다. 고양이 등을 쓰다듬는 느낌, 도토리묵이 젓가락에서 도망가는 그런 감촉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 감촉에 빠지고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은 주관적입니다. 또 객관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유행이기도 합니다.  물과 같은 잉크가 단단한 펜 끝을 따라 시원하게 흐르면서 매끄럽게 써지는 필기감, 이런 필기감을 경성(硬性)이라고 합니다. 경성의 만년필은 파커45처럼 펜촉이 작고, 두껍고, 넓적합니다. 꾹꾹 눌러 쓰는 필압이 많은 시대인 현대는 대부분의 만년필이 경성입니다.

파커21도 경성이고 파커 듀오폴드와 그 유명한 파커51 역시 경성입니다. 만년필 역사에서 파커는 평생 보증시대를 연 쉐퍼와 더불어 본격적인 경성의 시대를 열어 당대 최강자인 워터맨에 도전했습니다. 

이 도전과 응전은 약 20년간 이어졌습니다. 사실 워터맨은 단단하게 써지는 경성뿐만 아니라, 펜싱 칼처럼 챙챙 하고 누르면 푹신하게 눌렸다가 솟아오르는, 또 버드나무 가지처럼 촤악 감기는 연성을 포함한 모든 펜촉이 있었습니다. 다만 갖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특별하게 보이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약점이 없는 것이 약점이었습니다. 

   
  (왼쪽)1920년대 쉐퍼의 두꺼운 펜촉
(오른쪽) 1920년대 워터맨58 연성 펜촉 
 

하지만 창조적인 공격수인 쉐퍼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1920년 두세 배 두꺼운 펜촉을 만들고 평생 보증을 붙여 워터맨을 공격했습니다. 파커는 이 창조적인 공격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고, 역시 단단한 펜촉인 듀오폴드를 내놓으면서 이 공격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격에 워터맨은 시큰둥했습니다. 워터맨의 입장에서 쉐퍼나 파커는 작은 회사였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1900년대 초반 워터맨의 매출은 파커는 물론 다른 만년필 회사의 매출을 합쳐도 넘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었습니다. 

사회는 더 바빠졌고 자동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치 잔디를 밟거나 트램펄린을 구르는 듯 굳이 온몸을 쓰지 않고, 손끝으로도 탄력을 느낄 수 있는 푹신한 연성펜촉은 여유를 잃어가는 시대에 쉐퍼와 파커의 경성촉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펜 끝만 보이는 파커51의 펜촉   

1939년 워터맨은 헌드레드 이어 펜(Hundred Year Pen)을 발표합니다. 펜 앞에 백 년이 붙은 것은 보증이었습니다. 무려 백 년의 보증을 붙이고 온 힘을 기울여 발표한 일명 백 년펜은 연성도 경성도 아닌 어정쩡한 펜촉이었습니다. 1941년 파커는 그 유명한 파커51을 출시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파커51은 대표적인 경성입니다. 백 년펜은 파커51에 힘 한 번 못 쓰고 패배하고 맙니다. 이후 만년필 세계는 압도적으로 경성 촉의 만년필이 주도하게 됩니다. 이듬해 파커51의 성공으로 부랴부랴 등장한 쉐퍼 트라이엄프 역시 경성이었습니다. 

세상은 늘 바뀌기 마련입니다. 돌고 돌아 유행은 다시 돌아온다고 만년필이 볼펜에 주도권 빼앗기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연성 촉이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연성이든 경성이든 최선을 다해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고 돌아 유행이 다시 와도 열심히 만든 물건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비록 내 시절이 오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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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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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 (116.XXX.XXX.219)
아버지댁 이사가 있어 오래된 펜 두어개를 찾았습니다.
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아버지의 소장품이지요.
출근도 경쟁도 없고 부양의 의무도 다 이루어내신 아버지의 평온한 일상이 부럽습니다.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의 시절은 바로 지금이 아닐까요 ~ 만년필처럼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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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0 07:4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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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너무 멋진 모습입니다. ^^ 만년필 두어 개와 편안한 일상 제가 꿈구는 모습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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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07: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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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펠리칸 (175.XXX.XXX.32)
세상에 인간이 만들어 낸 물건들이 많습니다.

만년필이 아직 쓰임을 하고 만들어 진다는 것은 아직 필요에 의해 존재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행도 중요하지만 만드는 사람들의 철학과 고집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대가 지나 언젠가는 만년필 아니 필기구들이 쓰임을 다하는 날에도 저는 만년필을 쓰고 싶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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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9 15: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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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철학이 있어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오래가는 물건인 만년필 반드시 철학이 필요한 세계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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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07: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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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72.XXX.XXX.46)
표현이 워낙 다채로워서 마치 친구분의 표정이 눈 앞에 떠오를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아버지 몰래, 형제자매 몰래 귀한 것을 써보고 싶은 마음은 동서고금 변하지 않나 봅니다. 그 두근거림을 지금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경성처럼 선구적인 만년필도 만들지만 역시 사람은 실용성만으로는 살 수 없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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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9 09: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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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만년필이 재미있는 것은 그 시대를 품고 있기 때문 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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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07: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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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 (220.XXX.XXX.162)
만년필에서 우리 인생의 진리를 알아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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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9 08: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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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진리는 어디서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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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07: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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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106.XXX.XXX.216)
글을 읽으니 저도 연성과 경성 펜을 모두 다룰 수 있으면서 최선을 다해 살면 참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옆에서 말씀하시듯 생생한 느낌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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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9 08:5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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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박종진 (211.XXX.XXX.243)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후회도 미련도 어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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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07: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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