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홍원군이 고향이고 그곳에서 살던 부모님이 해방 직후에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6.25를 겪으면서는 많은 북녘의 사람들이 남하했지요. 그들은 자연스럽게 도민회, 시·군민회, 읍·면·동민회로 모였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 고향은 남한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을 좇아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8일에는 74차 군민회 총회가 열렸습니다. 150명이 모여서 간략한 식을 진행하고 오찬을 같이하는 모임이니 준비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회의 사흘 전에 초등학교 앞의 문방구에 가서 비닐 코팅을 의뢰했습니다. 회의장과 오찬장에 참석자의 위치를 지정해 주는 명패를 스물여섯 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코팅은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던 중 중년의 여인과 여학생이 들어와서 독서 기록 공책을 샀습니다. 학생의 수줍은 태도 때문인지 공책을 고르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주인은 끝까지 대화에 응해 주었습니다. 공책을 고른 다음에는 학생이 다시 작은 장난감 하나를 골라 사 달라고 하였습니다. 

같이 들어온 여인이 말했습니다. “어떻게든 묻어서 한 가지 더 사고 마네.” 내가 웃으며 한마디 끼어들었습니다. “아이가 무척 착하네요. 나 같으면 이것저것 여러 가지 사겠다고 졸랐을 텐데요.” “그래요?” 중년 여인과 학생은 주인과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들이 나간 뒤에 주인이 말했습니다. “저이는 젊은 할머니이어요.”

곧이어 남학생이 들어오더니 먹을거리를 두 개 사 들고 동전 지갑에서 백 원짜리를 꺼내 열네 개를 지불했습니다. 어쩐지 알뜰해 보이는 그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동전은 어떻게 모았어? 저금한 건 아닐 테고.” 학생은 낯선 사람의 질문에도 대답했습니다. “지폐 이천 원을 들고 은행에 가서 동전으로 바꾸었어요.” 이천 원은 부모에게서 받은 용돈이겠지요. 이번에는 주인이 말했습니다. “여기 와서 바꾸지 그래. 다음부턴 그렇게 해.” “여기서도 바꿔 주세요?” “그럼”

남학생 둘이 다가오더니 문 앞에 있는 빙과류를 사서 이빨로 비닐을 물어뜯으려 했습니다. 주인이 가위로 잘라 주겠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공손히 “감사합니다” 하고는 다시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습니다. 목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선 문방구보다 먹을 것 판매 비중이 더 높아요.” “그런가요? 수십 년 전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문방구에서 먹을거리를 많이 팔았지요.”

이번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들어섰습니다. 무언가 물건을 사 들었습니다. “학원에서 화장실 간다고 말하곤 나와서 여기 온 거여요.” 주인에게 말하는 투로 보아 낯익은 사이로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 문방구를 드나든 거겠지요.

다른 중년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주인과 인사하는 걸 보니 서로 잘 아는 사이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맡겨 놓은 짐(문방구 아님)을 찾아 들고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이번에도 주인은 묻지 않았는데 말했습니다. “저이는 아이들을 대학까지 다 졸업시키고 직장에 나가요. 그러니 부부가 같이 벌어요.”

주인은 그곳에서 25년 가까이 문방구를 운영했다고 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주인 여성에게 말했습니다. “사장님은 이 동네에서 아는 이도 많고 친해진 사람도 많아 보여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코팅이 끝나니까 주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다 절반씩 잘라야 하지요? 내가 잘라 드릴게요. 내가 가위질을 잘하니까요.“ 손재주가 젬병인 나는 반가웠습니다. 그는 절반으로만 자르는 게 아니라 다시 모서리마다 둥글게 오려 내었습니다. 그냥 두면 손을 다칠 수가 있다면서요.

다 끝나고 비용을 지불하려 했더니 카드 결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차, 초등학교 앞이지. 결국 주인은 은행에서 입금해 달라며 영수증에 계좌 번호를 적어 주었습니다. “내가 입금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그런 분으로 보이지 않아요.” “말씀은 고맙지만 혹시라도 깜빡 잊을 수가 있으니까 내 전화번호라도 적어 두세요.” 드디어 그곳 일을 끝냈습니다.

문방구에서의 일을 말하는 이유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청량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말과 모습을 보니 어른들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맹위를 떨치는 더위마저 식혀 주는 듯했습니다.

아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문방구 주인이 사람을 대하거나 대화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그냥 정다운 이웃 같았습니다. 

이틀 후 토요일에도 그날의 기운이 작용했나 봅니다. 앞서 말한 모임에서는 해마다 연로한 분들에게 경로위로금이란 이름으로 성의를 표합니다. 스물두 분에게 드리기 위해 봉투마다 준비해서 현금을 집어넣는 일은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일이라 지루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년과 달랐습니다. 얇은 백지로 정성스럽게 지폐를 싸서 봉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직 불편한 오른손으로 천천히 봉투에 성함을 썼습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해냈습니다. 

올들어 최고의 더위라는 기상청의 말과 달리 다시 시원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도 주변인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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