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없는’ 선풍기를 샀습니다. 10여 년 전 두 딸아이가 어렸을 땐 상상만 하던 선풍기 모양입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선풍기 날개에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넣었다 다치는 어린아이가 많아 늘 걱정이었거든요. 그런 까닭에 2010년께 영국의 D사가 날개 없는 선풍기를 처음 내놓았을 때, 그 비싼 것을 고민도 없이 바로 들여놓았습니다.

이제 우리 집엔 선풍기가 다섯 대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어마어마한 부자입니다. 이번에 산 건 강아지 벨을 위한 것입니다. 호기심 많은 벨이 발이나 머리를 넣었다 다칠까 걱정이 돼 날개 없는 것으로 하나 더 장만했습니다. 10여 년 사이 국내 제품도 많아져, 가격은 절반 아래로 뚝 떨어졌습니다. 둥그런 원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니 얼굴을 슬며시 넣었다 꺼내는 강아지가 참 귀엽습니다.

성인이 된 딸들은 선풍기 날개와 함께 추억 속 놀이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합니다. “우리 어렸을 땐 거실에 이불을 깔고 넷이 함께 자는 날이 많았잖아요. 엄마가 우리를 나란히 눕히고 선풍기를 틀면 입 모양으로만 하나 둘 셋 한 다음 선풍기 앞으로 가 얼굴을 들이밀고 ‘아아아아’ 하고 놀았어요. 서로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앞니 빠진 얼굴로 깔깔거리곤 했잖아요.”

큰아이의 추억을 듣는데 1970년대에 떠돌던 ‘선풍기 괴담’이 떠올랐습니다. 40대 이후 세대는 잘 알겠지만 그 시절 인기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만큼이나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선풍기 바람을 낮엔 얼마든지 쐬어도 되지만 밤에 틀어놓고 자면 사람이 죽는다는 설이었죠. 1960년 3월 금성사가 내놓은 ‘D-301’ 모델이 국내산 첫 제품이니, 선풍기가 귀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내친김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하니 ‘선풍기 사망 사고’ 보도가 넘쳐납니다. 

1972년 7월 18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희(稀)산소 탓, 통풍 안 되는 좁은 방에서 선풍기 틀고 자다 절명’ 제하의 기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다음 날인 19일 조선일보에는 “통풍이 안 되는 좁은 방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든 사람이 절명을 했다. (중략) 선풍기를 오래 쐬면 체온이 내려가고 얼굴이 붓는 등의 현상을 경험하는 수가 있다. 특히 가정주부들은 생활 지식으로 명심해둘 필요가 있겠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립니다. 

선풍기 괴담은 10년, 20년 계속 이어집니다. 1983년 6월 3일 조선일보엔 ‘선풍기 켜 놓고 자다 셋방 점원 질식 사망’ 제하의 기사가 납니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지난 1997년 7월 22일에도 ‘선풍기 켜고 자던 고교생 질식사’라는 동아일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사고는 끊이지 않습니다. 2005년 8월 4일 연합뉴스는 ‘폭염 속 익사, 선풍기 질식사 잇따라’ 제하 기사에서 선풍기 사망 사고를 다룹니다.

"선풍기 꼭 끄고 자거라!" 여름밤이면 집집마다 들리던 소리입니다. 중고교 시절 어쩌다 그냥 잠이 드는 날엔 아버지께서 방에 들어와 선풍기를 끄거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못된 놈들이 창으로 애들 자는 거 들여다볼 수 있으니 조금만 열고 창틀에 막대를 괴어 놔유” 하시던 엄마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리곤 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켜놓고 잠들면 산소가 부족해 호흡곤란으로 사망한다고 여기는 이가 많았습니다. 선풍기 바람에 체온을 빼앗겨(저체온증) 사망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 의견도 철석같이 믿었죠.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하는 ‘선풍기 사망’에 외국 언론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2016년 뉴욕타임스는 “한국은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극심한 전력부족 사태에 직면했다. 선풍기 사망은 이러한 ‘전력 절약 운동’ 중 하나로 홍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선풍기 사망설을 주장하는) 이 모든 가설은 사실이 아니다. 상관관계를 입증한 어떠한 관련 연구 결과나 통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영문판에는 선풍기 질식사가 ‘Fan Death’로 등재됩니다. "밀폐된 방에서 선풍기를 켜놓은 채 잠을 자면 사망할 수 있다는 일종의 미신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선풍기는 오랫동안 ‘누명’을 썼던 걸까요. 어쩌면 지금도 누명을 벗지 못한 선풍기가 올여름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경기침체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물가, 전기요금 인상 부담 때문일 겁니다. 노인이나 어린아이가 있는 집은 에어컨의 시린 바람이 부담스러워 선풍기로 더위를 식히겠지요. 아흔이 가까운 우리 엄마는 선풍기 바람도 싫다며 부채로 여름을 나고 있으니까요. 

여름 하면 으레 에어컨을 떠올리는 세상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선풍기 이야기를 하고 나니 좀 구닥다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에 좀 뒤떨어진 듯해도 방마다 선풍기가 있으니 든든합니다.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지금도 에어컨 커버를 벗기지 않은 이유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