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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향 닮은 사람
오중석 2023년 07월 01일 (토) 00:00:01

우리나라 자생 야생화 중에 백리향(百里香)이라는 꽃이 있습니다. 그 향기가 100리를 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꽃나무의 크기가 10cm 안팎으로 작은 데다 꽃잎 크기도 1cm가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쉬운 꽃입니다. 그런데 향기가 워낙 좋고 멀리 퍼져서 꽃보다는 향기로 꽃의 존재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서양 백리향의 영어식 이름은 타임(thyme)인데, 서양에서는 관상용보다는 차나 음식에 넣는 향신료로 많이 쓰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 중에는 백리향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와 차림새가 아니라 아름다운 인성으로부터 우러나는 인간적인 향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백리향을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 살맛이 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체구도 자그마하고 외모는 수수한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왠지 모르게 은은한 인간적인 향기를 풍기는 사람입니다.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향기가 아니라 사고의 깊이와 올바른 심기에서 은연중에 풍겨 나오는 말본새와 인격의 향기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는 서로의 향기를 진하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인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는 것은 상대방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향기를 지닌 인간은 연인들이 느끼는 연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향기가 아닙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백리향처럼 향기로운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아직도 세상에 인간적 향기를 간직한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됩니다. 수려한 외모에다 최신 패션으로 몸을 감싼 사람이 풍기는 값비싼 향수의 향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 됨됨이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요즘에는 백리향과 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이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살면서 그런 사람을 여러 명 만날 수 있었던 나는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한 번 만나고 나면 어떤 핑계를 대든 또 만나고 싶어집니다. 만나자마자 불쾌감이나 스트레스를 잔뜩 주는 사람들보다는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이 같은 인간적인 향기의 소유자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습니다. 나이 많은 노학자나 예술인, 성직자일 수도 있고 평범한 직장인, 공사장 노동자, 하물며 시장 상인 중에도 이런 인격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정치인, 고위관리 등 지위가 높은 사람, 부자, 권력자, 학식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향기로운 인격을 지녔을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제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향기로운 인격의 소유자들을 돌이켜보면 성직자, 시골 초등학교 교사, 공예가, 지방의 말단 공무원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과연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백리향을 닮은 사람으로 비쳤을까 자문해봅니다. 결론은 ‘아니올시다’입니다. 평생을 기자로 살아오면서 남이 밝히기 싫어하는 사실, 지키고 싶어 하는 비밀을 어떻게든 캐내어 밝히는 것을 업으로 삼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분노, 불쾌감과 스트레스를 주었을지 상상해보니 나는 백리향 닮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내가 만난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향기는커녕 경계심과 스트레스만 주는 못된 인간이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해오면 걱정이 앞섭니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보자고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만나려는 목적을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만나기 전부터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면 즐겁고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요즘에는 대부분의 만남이 매우 사무적이고 주고받고(give and take)식의 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아마도 그동안 내가 만난 상대방들도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요즘엔 중요한 업무는 물론, 개인적인 소통이나 인간관계도 대부분 인터넷상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첨단기술시대, 인공지능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지만 모든 인간관계가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만 이뤄진다면 이것처럼 삭막한 세상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개인 간의 1대 1 만남보다는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상의 모임, 사회연락망을 통한 인간관계에 더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상에서 어떻게 향기로운 인간미를 풍기는 백리향 닮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아마도 구닥다리 인생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인간관계론이 지금 세상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지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전후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저는 주어진 생의 마지막 날까지 마치 목마른 나그네가 샘물을 찾아 헤매듯 인간의 향기를 지닌 백리향 닮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녀 볼 생각입니다.

 

 

 

 

오중석

연세대 철학과, 뉴욕 포덤대 등에서 수학했으며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문화부장, 주일대사관 홍보공사 등을 거쳐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서울지국장을 역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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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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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관찰자 (175.XXX.XXX.166)
우리 생활을 되돌아 보면서 큰 반향을 느낄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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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3 09:4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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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수 (39.XXX.XXX.105)
이 글을 통해 제 자신도 돌아 보게 됩니다.
농촌지도직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하고 농촌진흥청 강소농민간전문위원, 그리고 국제사이버대학교 웰빙조경학과 객원교수로 7년차 강의를 해 오며 고객인 농업인들과 농업을 희망하는 분들께 과연 향기나는 생을 이어 왔는지?
되돌아 보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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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1 22: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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