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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권오숙 2023년 11월 08일 (수) 01:04:09

지난해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긴 뒤부터 처음으로 운동이라는 걸 시작했습니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동네 공원을 몇 바퀴 돌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유튜브를 보면서 홈 트레이닝을 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터라 운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마와 싸우기 위해, 노화를 늦추기 위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점심 식사 후, 저녁 식사 후 일정 시간에 공원을 돌다 보니 늘 같은 시간에 운동하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칩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도 많고, 이미 뇌질환의 습격을 받아 한쪽으로 기운 몸을 절룩거리며 걷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비 정도가 심하여 다른 이의 부축을 받아가며 한 발 한 발 힘겹게 걷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렇게 젊고 건강한데 무얼 저리 열심히 운동하지?' 하며 의아한 생각이 들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최근 걷는 행위에 담긴 실존적 의미를 사유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 시월(2023.10.6~10.22) 동국대학교의 이해랑 예술 극장에 오른 <햄릿: 걷는 인간>이라는 연극 관람입니다. <햄릿>은 국내외 연극 무대에 이미 너무 많이 오르고 자주 오르는 작품이어서, 늘 이번 공연은 이 작품을 어떻게 달리 해석하고, 새롭게 연출했을까가 관람 포인트가 됩니다. 

나진환 감독이 각색하고 연출을 맡은 <햄릿: 걷는 인간>은 플롯의 큰 뼈대는 셰익스피어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수많은 인문 고전을 인용하면서 아울러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와 부조리한 면에 대한 비판을 담아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당 부분의 대사를 새롭게 창작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 대사는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의 변절을 보고 햄릿이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1막 2장)라고 울부짖는 독백을 바꾼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물질주의에 물들어 변모해가는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한 명대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진환 감독의 <햄릿>은 '걷는 인간'이라는 부제뿐만 아니라 포스터 그림에도 조각가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포스터 속 햄릿의 모습은 자코메티의 <걷는 남자 I>(Homme Qui Marche I, 1960)과 꼭 닮았습니다. 

스위스 출신의 실존주의 조각가로 알려진 자코메티는 잇단 친지들의 죽음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느낀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인간의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성을 형상화하고자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독특한 인물상을 남겼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걷는 남자>는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 비관적이기만 했던 그가 희망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해석됩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커다란 보폭으로 걷는 모습에 운명과 죽음 앞에서 나약하기만 한 인간이 그런 실존의 존재성을 딛고 씩씩하게 살아나가는 역동성을 담아냈다고 합니다. 

몇 안 되는 관객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던 공연장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출연 배우의 숫자 정도밖에 안 되는 소수의 관객을 앞에 두고 인터미션 15분을 포함하여 장장 3시간 이상을 공연하는 배우들을 보며 가슴이 저리면서도 어떤 숭고함도 느껴졌습니다. 공연 후반부에 원작처럼 오필리아의 무덤을 파는 늙은 광대 둘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파고 있던 무덤에서 나와 너스레를 떠는데 서로에게 꿈이 무엇이었는지 묻습니다. 둘 중 한 명의 꿈은 작가였고, 나머지 한 명의 꿈은 배우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연극’배우라고 꼭 집어 말합니다. 

평생 남의 무덤 파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작가와 배우의 꿈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는 이 극 속 광대들은 대형 뮤지컬이나 영화, 넷플릭스 같은 OTT에 밀려 점점 황량해지는 연극 무대를 지키고 있는 현실 속 배우들의 실존을 극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햄릿이 온갖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도 사유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전체 극의 설정은 이런 부조리한 연극 현실에도 외롭고 고된 배우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연극계의 실존적 의지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이 연극에서도, 자코메티의 조각에서도 걷는 행위는 그 어떤 비극적 실존 상황에서도 삶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의 은유겠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늘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게 만들어주는 예술의 낯설게 하기는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걷기’라는 행위에 담긴 실존적 의미를 내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절룩절룩, 뒤뚱뒤뚱, 혹은 종종거리며 걷고 또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소 처연해 보이기는 하지만, 자꾸 그들을 주저앉히려는 세월과 시간에 맞서려는 그들 의지의 결연함이 새삼 느껴졌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표현대로 인간은 누구나 “시간의 낫질”(소네트 60번 12행)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준엄한 시간의 파괴력에 쉽게 휘둘리지 않으려고 오늘도 걷고 또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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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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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상 (14.XXX.XXX.154)
걷기세상에 들어서셨군요. 환영합니다. 누죽걸산! 아시죠?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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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0 08: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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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숙 (175.XXX.XXX.176)
누죽걸산! 늘 명심하여 건강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23-11-18 21:56:2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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