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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학 출판부의 치욕'
정숭호 2023년 11월 10일 (금) 00:04:17

Ⅰ.미국 명문 대학인 예일대학 출판부(The Yale Press)는 1964년 출판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해 5월 이곳에서 나온 890쪽짜리 방대한 책(저자가 초판을 크게 보완하고 뜯어고친 재판이다) 곳곳에 오류가 넘쳐났다. 이름만으로도 권위가 넘치는 아이비리그 대학 출판부가 낸 책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322쪽에서는 네 줄이 사라졌고, 468쪽은 통째로 날아갔다. 469쪽은 두 번 인쇄됐고, 563쪽에서는 두 문단이 순서가 바뀌었다. 615쪽에서는 여덟 줄이 틀렸고, 1949년에 출간된 이 책 초판 페이지마다 들어 있던 ‘난외 표제(Running Head-페이지 위나 아래에 인쇄된 책 제목 혹은 장 제목 등)가 이번에는 완전히 쏙 빠졌다. 이런 책의 정가를 초판보다 50%나 비싼 15달러로 매겼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예일 출판부의 잘못은 이뿐이 아니다. “곳곳에 옅게 인쇄된 문장과 짙게 인쇄된 문장-돋움체로 여길 수도 있는-이 뒤섞여 있었다. 짙게 인쇄된 부분은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가 의도한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날아간 부분과 오탈자, 뒤바뀐 문단은 예일 출판부가 정오표를 배포해 바로잡는 체했지만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문단의 농담(濃淡)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예일 출판부가 출판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비판은 이 책을 엉망으로 찍어낸 잘못이 아니라, 출판부 경영진의 의도한 결과라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당시 예일 출판부의 수뇌부는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들이 적대시하는 진영의 우두머리 격인 인사가 낸 이 책이 다시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망상이 범죄에 가까운 조작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된 ’인간 행동(Human Action)‘이다. 저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1881~1973)는 사망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위대한 자유주의자이자 시장경제 체제의 최고 수호자로 평가받는 오스트리아 태생 사상가이자 학자이다. 자유로운 개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자유가 풍요를 보장하며, 자유가 인류 문명 발전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임을 여러 고전 독해와 역사적 사례와 깊은 사유를 통해 밝혀 놓은 이 책은 원래 1940년 스위스에서 독일어로 처음 나왔다. 독일어 제목은 ’Nationalökonomie(국민경제)’였다. 

유대인인 미제스는 1930년대 중반 나치의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나 수년간 스위스에 머물면서 이 책을 썼다. 그는 당시 맹렬한 기세로 발호하던 사회주의(나치 전체주의와 소련 공산주의, 국가는 민간의 경제 활동에 간섭해야 한다는 간섭주의 등등)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진보해온 서구 문명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지식인은 물론 일반 독자도 자유와 자본주의의 중요성에 관해 이론과 지식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알리려는 게 이 책 저술 동기이다.

 
  '인간 행동' 초판

나치의 기세가 갈수록 드세지자 뉴욕으로 망명한 그는 이 책 영어 개정판을 내는 데 전력을 쏟아 넣었다. 미국에서도 사회주의 진영이 세력을 넓혀 나가는 것을 눈과 귀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례 등을 보완한 영어 초판은 ‘인간 행동’이라는 제목을 달고 1949년 예일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새로운 제목은 “경제학은 지금까지 가장 잘 다듬어진 인간행동학의 한 부분”이라는 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예일 출판부 경영진은 출간을 준비하면서 "우리에게 이 훌륭한 책을 낼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미제스측에 보냈다. (편지를 받은 이는 미제스를 예일 출판부에 소개한 저명 경제 칼럼니스트 헨리 해즐릿이다. 위에 인용한 예일 출판부의 ‘만행’ 비판도 그가 쓴 칼럼 일부이다. 예일 출판부는 이 편지를 보낸 후 미제스에게 감사를 직접 표현한 편지도 보냈다.)

1949년 9월에 나온 초판은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3쇄를 찍을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이 책이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저작들에 비견할 만하다는 논평도 나왔다. 유럽에서만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미제스는 이제 미국에서도 사회주의자들에 맞설 학자로서, 사상가로서 명성을 누리게 됐다. 

경제적 어려움도 해소 됐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직업 없이 신문에 기고한 논평 원고료와 간헐적인 강연료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이 책으로 인해 대학에 출강하게 됐을 뿐 아니라 미국 전역은 물론 남미까지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게 됐다. 출간 1년 뒤, 미국 최대의 독서클럽(The Book-of the-Month Club)은 이 책을 ‘이달의 책’으로 선정했다. 교양 있는 대중도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하는 책으로 인정한 것이다. 예일 출판부는 기세를 올려 미제스의 다른 저작들도 잇달아 출판했다. 강연료와 인세가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Ⅱ.예일 출판부가 1964년 이 책 증보판(재판)을 엉망진창으로 인쇄해 출간한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증거는 넘친다. 

결정적인 증거는 저자가 자신의 저술이 어떻게 편집됐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출판이 진행됐다는 점이다. 예일 출판부는 설명 없이 출간을 미루었으며 교정쇄를 보내달라는 미제스의 요청도 무시했다.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교정쇄를 보내지 못한다,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믿어달라고 답했을 뿐이다. 

 
미제스 부부(출처:미제스 소사이어티 홈페이지)  

예일 출판부는 증보판을 미제스에게는 한 권도 보내지 않았으며, 언론에도 알리지 않았다. 백 곳 이상의 언론에 배포돼 좋은 서평을 이끌어낸 초판과는 달리 증보판을 다룬 서평은 드물었다. 오류투성이인 책에 높은 가격을 매겨 서점에 내놓은 것도 의심을 받는다. 독자들은 이 책을 외면했다. 이 책을 구비한 서점은 별로 없었으며, 몇 권 갖춰 둔 서점에서도 이내 사라졌다. 미제스가 변호사를 고용해 법적 대처에 나서자 예일 출판부는 법정에 가지 않는 조건으로 미제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합의했다. 

미제스는 예일 출판부 경영진 교체가 이 문제의 배경이라고 생각했다. 초판을 찍을 때 자신을 적극 지원해준 경영진이 물러나고 새로 들어온 경영진이 저지른 소행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들과 자신의 이념 차이 때문에 이런 조악한 책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학문의 길에 들어서면서 평생 사회주의를 비판해온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수호자 미제스와 이념이 다른 사람이라면 그들의 이념은 무엇인가? 사회주의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Ⅲ.이념은 다를 수 있다. 생각은 자유다. 생각은 물론 그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예일 출판부는 미제스의 자유주의 사상, 자본주의 옹호가 미국인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것을 무도한 방법으로 막으려다 자기들이 자랑하던 역사와 전통에 치욕을 끼쳤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 채 인류를 구원하겠다고 나댄 자들이 사실은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퇴영주의자임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 글은 미제스 부인 마지트 폰 미제스(1890~1993)가 1976년에 출간한 ‘미제스와 함께한 나날(My Years with Ludwig Von Mises)'을 바탕으로 썼다. 이 책 마지막 부분을 읽을 즈음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재판이 무죄로 끝났다. 박 교수가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검찰이 그를 기소한 지 8년 만에 나온 결론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의 표현은 피고인의 학문적 주장 내지 의견의 표명으로 평가함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미제스와 박 교수가 겪은 일의 진행과 결과 사이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생각하다가 이 작문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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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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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순 (211.XXX.XXX.33)
재미있게 읽은 유익한 글입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 익숙치 않은 우리대한민국 사회에서 내편 아니면 저쪽편이라는 2분법만 판치고 있는데 우리사회에서도 과거에 충분히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잇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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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4 11: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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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ddb (175.XXX.XXX.202)
친일파들의 통장 한번 털어봤으면 싶다. 일본관련된 곳에서 연구비 장학금 등등 돈을 받은 것이 있나 없나 궁금하다
답변달기
2023-11-10 10:20:23
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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