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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을 찾아서
방석순 2023년 11월 13일 (월) 02:53:33

평화가 꼭 거창하게 온 세계, 온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는 아닙니다. 가장 절실한 평화는 사실 그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습니다. 바로 가정의 평화, 부부 사이의 평화지요.

대체로 아내는 무슨 일이든 별 망설임 없이 후다닥 벌여놓는 편이고, 저는 이리저리 저울질부터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리되었는지 몰라도 집 안에서 주로 아내는 일을 벌이고, 저는 치우는 쪽입니다. 이런 경우 어느 쪽이 더 불편을 느끼게 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지요.

헝클어진 실타래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애쓰는 저를 보더니 아내는 가위를 들고 와서 한가운데를 툭 잘라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긴 실은 길게, 짧은 실은 짧게 용도에 맞춰 쓰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보면 솔로몬왕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행용(휴대용?) 휴지를 사서는 살펴보지도 않고 옆구리를 북 찢어 휴지를 꺼냅니다. 제가 “여기 한복판에 여는 금이 있잖아.” 하면 그제야 “어, 그런 게 있었네.” 하고 시큰둥하니 대꾸합니다. 

친구의 밤 산에 밤 주우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음악 틀어놓고 커피 끓이고 하는 사이 아내는 벌써 알밤 한 주머니를 주워 들고 왔습니다. 다른 해보다 밤알이 훨씬 굵다며 모두들 신바람이 나서 밤을 주웠더니 산 아래로 들고 내려가기에도 벅찬 양이 되었습니다. 안 그랬으면 벌써 아내는 밤나무에 올라타 가지를 흔들어댔을 겁니다.

   

열심히 주워 모은 밤을 작은 카트에 다 실어보려고 친구와 저는 한참이나 끙끙거렸습니다. 어떻게든 가져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아내가 불쑥 그냥 풀숲에 숨겨 두고 가자고 말합니다. “아니, 지나던 사람이나 멧돼지가 건드리면 어쩌려고?” “밤나무 밑에 떨어진 밤이 지천인데 누가 엉뚱한 풀숲을 뒤지겠어요?” 아내의 통 큰 제안에 마지못해 따르면서도 돌아오는 찻간에서 은근히 마음을 졸였습니다. 며칠 후 친구 딸 내외가 일러준 풀숲에서 밤 한 자루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었습니다. 득의만면한 아내의 눈웃음에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떤 집에선 남편이 신었던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아 타박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집에선 전혀 일없습니다. 아내가 뒤집어 벗어 놓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까짓 뒤집어 빨든 바로 해서 빨든 사실 별문제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선이 굵은 건지, 신경이 무딘 건지 아내는 웬만한 일엔 시비하거나 잔소리하는 법이 없습니다. 거꾸로 어쩌다 제가 하는 몇 마디 잔소리에도 참지 못하고 금세 불편한 내색을 합니다. 아내는 왜 그렇게 자잘한 잔소리를 하느냐고 힐난합니다. 저는 잔소리가 싫으면 제발 두 번 다시 잔소리 않게 주의 좀 하라고 대꾸합니다. 되풀이되는 입씨름에도 물론 상황에는 조금치의 변함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 아니 얼마 전까지도 이런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가 지속되어 왔지요. 마누라 칭찬하면 팔불출에 든다지만 마누라 흉을 드러내는 것도 불출이기엔 마찬가지니 시비거리의 열거는 참으려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암만 잔소리해 봤자 마누라의 부주의는 고쳐지지 않아. 결국 내 잔소리로 감정만 상하게 될 뿐 효과는 빵점 아닌가? 그런데 왜 마누라는 내 부주의나 실수에 잔소리를 안 하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입을 다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래, 함께 실수하고 함께 입 다물고…’

그렇게 우리는 평화의 길을 찾았습니다. 아내가 혹시 방바닥에 음식물을 떨어뜨려도 암말 않고 걸레 가져다 훔치고, 슬리퍼에 질펀하게 물을 흘려도 얼른 걸레로 닦아내고. 그런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 입가에 웃음꼬리가 달렸습니다. 대신 저도 방바닥에 이것저것 연장을 어질러 놓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그래서 둘은 오늘도 탁자 아래 밥풀과자 질질 흘려가며 TV 자연다큐에 빠져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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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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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제 (211.XXX.XXX.22)
재미있게 일었습니다
저희 집과는 반대로 되어 있군요
저도 기다리다 보면 집안에 평화가 언젠가는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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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18: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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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203.XXX.XXX.156)
두 분의 평화롭기 그지 없는 모습이 눈에 서언합니다.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부부 아니고서는 감히 깨달을 수 없는 경지라 생각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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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10:5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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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124.XXX.XXX.108)
워낙 둔해서요.
진작 그랬더라면 아까운 세월 덜 놓쳤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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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12: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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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 (220.XXX.XXX.179)
아주 현명한 판단을 하셨군요. 저는 집안일 거드는 것을 운동삼아 한다고 마음먹으니 평화롭습나다. 우리 정치꾼들도 이런 판단을 내릴 정도의 지혜를 갖출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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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10: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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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124.XXX.XXX.108)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도 얻었습니다만 이게 지혜인지 핑계인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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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12: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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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211.XXX.XXX.183)
행복이 마 ---악 눈에 보입니다,
탁월한 선택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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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07:52:59
0 0
방석순 (124.XXX.XXX.108)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됐지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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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12:34:3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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