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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늄 만년필 T-1
박종진 2023년 11월 17일 (금) 00:23:13

가장 좋은 만년필 재질은 무엇일까요?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에 사용하던 경화고무 또는 에보나이트로 불리는 이 재질은 부식되지 않고, 치수 변동이 없었기 때문에 192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나온 플라스틱 이전에 최적의 재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컬러가 다양하지 못했습니다.

​1924년 영롱한 쉐퍼의 옥색 만년필이 나오자 이 재질은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플라스틱은 게다가 가볍고, 경화고무보다 질겨 잘 깨지지 않았습니다. 또 가공이 쉬워 대량생산에 적합했습니다. 파커, 콘클린, 월 애버샵 등이 쉐퍼를 따라 플라스틱 만년필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당시 가장 큰 회사였던 워터맨은 이들보다 몇 년 늦은 1929년에 플라스틱 만년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열린 플라스틱 시대는 오래 갔습니다. 사실 지금도 플라스틱 만년필 시대입니다. 대부분 만년필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100%가 없는 것처럼 플라스틱은 만년필 세계를 100% 만족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세대 정도가 지난 1964년, 몸체 전부를 은(銀)으로 만든 파커 75는 신선했고 이것은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바야흐로 금속 만년필의 유행이 시작되었고 명실공히 라이벌 없는 파커 만년필의 독주 시대가 열렸습니다. 당시 파커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파커51, 파커75의 성공으로 넉넉한 자본은 물론 뭐든지 만들 수 있는 세계 최고 기술진을 갖고 있었습니다. 경쟁사 모두를 이긴 파커 사(社)는 “내가 최고야”라고 자랑할 만년필이 필요했습니다. 티타늄 만년필은 이때 나왔습니다. 1970년 ‘파커 T-1’이란 이름을 걸고 말입니다. 파커사는 왜 티타늄으로 만년필을 만들었을까요? 

원자번호 22번인 티타늄(또는 티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은 은회색에 가볍고 강도가 크고, 내식성이 강한 금속입니다. 내식성이란 금속이 부식이나 침식에 잘 견디는 것을 말하는데, 티탄은 바닷물에 3년을 담가 두어도 부식되지 않을 만큼 내식성이 강합니다. 가볍고 강도가 크고 내식성이 강하기 때문에 항공기, 우주선, 미사일 등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만년필이 항공기에 요구되는 재질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입니다. 만년필은 오래가야 하는 물건이라 강도가 높으면 좋고, 일반적으로 잉크들은 강한 산성이라 내식성이 강한 것은 만년필에는 꼭 필요한 요건입니다. 또 밀도가 적어 가벼운 것은 일반적으로 무거운 금속의 단점으로 보완하는 아주 매력적인 요소였습니다. 

 
(왼쪽) 1970년에 나온 파커 T-1 만년필
(오른쪽)펜촉 뒤에 잉크를 조절할 수 있는 나사 
 

그리고 당시는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 시대이면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막 등장한 때라서 우주선과 항공기에 사용되는 티타늄은 그 재질만으로도 첨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디자인 역시 날개만 없지 우주선 또는 로켓, 미사일을 닮았습니다. 덧붙여 새로운 장치도 장착되었는데, 펜촉 밑에 잉크 조절 장치를 만들어 나사를 돌리면 잉크를 적게 또는 많이 나오게 하여, 가는 글씨와 굵은 글씨를 선택하여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만년필은 단 1년 만에 생산이 중지됩니다. 당시 최고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티타늄을 연삭 가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티탄을 공급하는 업체의 불량이 많았고 가공하다 실패하는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생산하면 할수록 손해가 났기 때문에 파커사는 1년 만에 생산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모로 시대를 너무 앞서간 만년필이었습니다. 티타늄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당시 파커사 만년필의 인기에 비해 덜 팔렸습니다. 10만 개 좀 넘게 팔렸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적은 편입니다. 만약 100만 개가 팔리는 대히트였다면 파커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산을 계속했을 겁니다. 아무래도 우주선을 닮은 디자인이 이목을 끌었지만, 지갑을 열기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년필 세계에 T-1이 남긴 유산은 많습니다. 만년필을 만드는 재질에 티타늄을 들여왔고, 펜촉과 손잡이가 같은 재질로 만든 인티그럴(integral) 펜촉의 시작이었고 이것은 일본 파일럿 만년필 뮤 701과 파커 팰콘(falcon)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T-1은 적은 수량과 1년만 생산되었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때문에 만년필 세계에서 전설이 되어, 파커를 좋아하는 콜렉터들이 갖고 싶어 하는 1순위 만년필이 되었습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고 합니다. 운 좋게 시대를 잘 맞나 한평생 잘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시대를 못 만나 성공하지 못하는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실력입니다. 당장 내일 내 시대가 와도 써먹을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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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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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욱 (211.XXX.XXX.205)
만들어진 년도가 1970년이라고 들었습니다. 1년만 생산된 T1이 지금도 회자 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신경을 쓴 만년필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참 좋아하고 특이한 필기감을 가진 만년필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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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1 11: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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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 (116.XXX.XXX.219)
탐험가와 선주는 항상 싸운다네요 ㅋ 비록 조기에 단종되었지만 파커가 훌륭한 유산을 남겼네요. 가을도 없이 겨울이 왔습니다. 온기가 있는 세상을 위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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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12: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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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72.XXX.XXX.46)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는 소재의 만년필을 개발하고 출시한다는 건 참 대단한 포부와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귀한 금속으로 만든다는 건 실패의 위험이 훨씬 클텐데요. 후대 사람으로서는 펜의 필기감이 궁금해지네요. 꿈같이 써졌으면 생산이 조금이나마 더 오래 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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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7 11:5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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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 (220.XXX.XXX.162)
이질적인 금속광택이 신기하네요
신기한 만년필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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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7 10: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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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210.XXX.XXX.138)
비록T1이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겠지만 너무나 멋졌기에 시대를 초월해서 현재 우리 마음을 흔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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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7 09: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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