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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 플래카드
박상도 2023년 11월 21일 (화) 00:01:38

“선진 조국 건설로 밝아오는 80년대” 1970년대 필자가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에 붙어있던 플래카드였습니다. 철마다 학교 건물에 플래카드가 바뀌어 붙었는데 유독 '밝아오는 80년대'가 기억나는 이유는 배신감 때문입니다. 학교에 대문짝만하게 써놓은 글귀대로 80년대가 되면 선진국이 되어 온 국민이 행복하게 살거라 믿었는데 격동의 80년대를 보내면서 믿음이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88서울 올림픽을 치르기도 했지만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줘도 80년대에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그때 얻었습니다. 그리고 플래카드에 대한 허상 역시 깨닫게 됐습니다.  

“바로 보자 거짓 평화, 막아내자 적화 야욕”, “4.19 혁명 정신 반공으로 빛내자”, “의심 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간첩 잡아 애국하고 유신으로 번영하자”라는 반공 플래카드와 “근면, 자조, 협동으로 새마을을 건설하자”, “한 사람 10원 낭비 4천만 4억 낭비” 같은 새마을 플래카드 등등 수많은 선전과 구호 속에 필자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한쪽으로 쏠린 선전과 구호가 범람하면 반대되는 의견은 위축됩니다. 이를 학문적으로 증명한 것이 ‘침묵의 나선형 이론’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4.19 혁명 정신과 반공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때는 그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80년대 대학가에도 “군부독재 타도하자”, “전두환을 처단하자”는 플래카드가 넘쳐났습니다. 군인을 군바리로 얕잡아 부르며 경멸하기 시작한 때도 이즈음부터인 것 같습니다. 가족 중에 군인이 있던 학생들은 아마 대학 다니기 불편했을 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군인인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분 아니야.”라고 얘기한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침묵하면서 학교를 다녔을 겁니다. 

이 침묵의 나선형 이론을 깬 경우가 있었습니다. 1987년 시위가 한창일 때, 학과에서 수업 거부에 대한 논의를 할 때였습니다. 당시는 100%로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나는 수업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습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져서 ‘쟤가 왜 저러지?’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 친구를 설득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해결이 되지 않자 다수결이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후 그 친구는 사회성이 떨어지는 친구로 여겨졌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습니다. 수업 거부를 결의하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시위에 동참한 것이 그때는 당연한 결정이었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 우리 역시 과격한 전체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적화 야욕 분쇄하자”와 “군부독재 박살내자”는 플래카드는 그 성격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대척점에 있는 전혀 다른 주체가 만든 플래카드지만 기능과 목적 그리고 과격함에서 같은 집단의 구호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군부독재 박살내자”는 구호는 그 목적을 이뤘고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플래카드가 더 필요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하는 국회의원과 당협(지역)위원장이 붙여놓은 플래카드를 보면서 ‘어쩌다 이 지경이 됐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해 김민철, 서영교, 김남국 의원이 발의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되면서 정당이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해 자유롭게 현수막을 걸 수 있도록 허용하는 예외 조항이 신설됐습니다. 정당의 현수막 설치를 옥외광고물 허가·신고 및 금지·제한 규정 적용의 제외 대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국회의원이나 당협(지역)위원장은 자신의 지역구 아무데나 플래카드를 걸 수 있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웃기는 것은 이 법안이 본회의에서 205명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됐다는 겁니다. 역시 대한민국 정치는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가도 눈앞의 이익에는 여야가 한마음이 되어 일사천리로 법안을 통과시키니 말입니다. 그 덕에 우리 사회가 참으로 후진 꼴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 법안은 현직 국회의원에게 엄청난 기득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임기 내내 자신을 홍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국회의원들이 내건 플래카드에 자신의 이름과 사진이 큼지막하게 찍혀있지 않은 경우를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길거리가 싸움판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탄핵과 구속이 난무한 플래카드들을 보면서 눈이 피곤해 죽을 지경이지만 싸움은 멈출 기미가 안 보입니다. 나라가 반 토막이 났는데 길거리의 플래카드는 여전히 싸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완용의 부활인가’, ‘나라 팔아먹은 일본 1호 영업사원 월급은 일본에서 받아라’, ‘죄 지었으면 벌 받아야지’ 등등 비방과 비난으로 얼룩진 ‘아무 말 대잔치’를 보고 있으면 같이 살자는 건지 같이 죽자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플래카드로 인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만 구호와 플래카드로 정치를 한다고 배웠습니다. 미국에서 2년을 넘게 살았지만 단순 광고를 걸어놓은 현수막은 본 적은 있지만 플래카드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올 초에 여행을 갔던 파리에서도 플래카드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도시 미관에 엄격한 파리 시내에서 플래카드를 거는 일은 아마 꿈도 꾸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대를 역행해서 플래카드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양쪽 진영 모두 물러서면 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대 여론 홍보전인데 여기서 지면 선거에서 진다고 생각하는 걸 겁니다. 그런데 선거에서 어느 쪽이 지든 이기든 대한민국 정치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최근에는 온 나라 국회의원들이 수능 수험생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붙여놨는데 이분들이 이렇게 자상한 분들이었나?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수능과 국회의원의 연결점이 4.19 혁명과 반공만큼이나 뜬금없어서 플래카드를 볼 때마다 냉소를 짓게 됩니다. 어쨌든 희한하게 법을 개정한 바람에 과거에는 선거철에만 보던 흉물스러운 정치 플래카드를 이제는 일년 열두 달 계속 보게 되었고, 내년 4월 총선까지 또 어떤 쓰레기 같은 플래카드들을 보게 될지 미리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 자정하는 노력을 기울여서 사진처럼 사람들 통행에 방해가 되고 안전에 방해가 되고 장사에 방해가 되는 위치에는 걸지 않는 상식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필자가 자주 걸어 다니는 시장 길인데 공공재개발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오래전부터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무리하게 국회의원의 플래카드를 걸어 놔서 횡단보도의 시야확보가 불편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상점의 간판을 가려서 장사에도 지장이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여기에 플래카드를 걸어야 했을까요? 게다가 주민들이 뜨겁게 대치하고 있는 공공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 아래에 지역 국회의원이 나 몰라라 하고 자기 홍보하는 플래카드를 걸어 놓은 의도가 무엇인지 참 궁금하고 딱합니다.

내년 선거에는 번호와 색깔을 막론하고 플래카드로 선동과 분열을 조장하는 후진 정치인이 아닌 대한민국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을 제대로 뽑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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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 (125.XXX.XXX.230)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특히 도로가의 플래카드 때문에 시야를 가려 인명사고가 날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보행자나 자전거, 킥보드를 탄 사람이 횡단보도 등을 건너려고 할 때 플래카드가 시야를 막아 차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요. 정해진 장소만 허용하고 일절 금지해야 합니다. 정당, 시위, 광고용 천막 모두 해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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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1 08: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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