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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쑤기의 달인, 자식 농사도 달인
함인희 2023년 11월 29일 (수) 02:07:52

지난 11월 둘째 주에 2박 3일 부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팔순 할머니부터 6개월짜리 손주까지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한데 여행 중에 그만 저 혼자 배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함께 갔던 식구들 모두 별 탈 없었던 걸 보면 음식 탓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피로가 누적되어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나이 들어가는 티를 낸 것이지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흰죽을 쑤어 먹으며 속을 달랬습니다. 흰쌀을 찬물에 불렸다가 참기름 한 숟가락 둘러 달달 볶은 후에 소금 약간 넣고 죽을 끓였습니다. 속이 허한 탓인가 입맛이 돌아오질 않길래, 꽤 오랜만에 조치원의 소문난 죽 집을 찾았습니다.

전통시장 입구에서 20미터쯤 들어가 첫 번째 오른편으로 난 골목을 나가면 바로 <행복 죽> 간판이 보입니다. 죽 집 여주인장을 처음 보았을 때, 만일 조치원 복숭아 미인대회가 있었다면 반드시 세 손가락 안에 들었을 것 같은 미모에 깜짝 놀랐답니다. 죽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옆 벽면에 상인대학 수료식 때 사각모 쓰고 찍은 주인장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 속 모습 또한 미스코리아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곧 단골손님이 된 저와 주인장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허물없이 터놓고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지요. 참 신기합니다. 서울살이 때는 마트에서 일하는 아줌마들과 십수 년을 마주쳐도 친분이 안 쌓였는데, 이곳 조치원에선 두세 번만 마주치면 서로 눈인사를 나누기 시작하고 곧 말을 트는 사이가 되고 마니 말입니다. 

주인장은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서른 갓 넘어 남편과 사별했다고 합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도 없어 죽 장사를 시작했는데, 남편 떠난 지 사십 년도 훌쩍 넘은 지금, 두 아이 모두 대학까지 보내고 각자 걸맞은 짝도 찾아주었으니, 지난 세월 참으로 고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저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죽은 제대로 안 퍼지면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고, 너무 퍼지면 식감이 떨어지는 만큼, 끓이기가 제법 까다롭습니다. 부드럽게 넘어가면서도 한결같이 오묘한 식감을 유지하는 죽 집 주인장의 솜씨는 진정 달인 수준에 올라선 듯합니다. 입맛 까다로운 제 이모가 오래도록 꾸준히 찾는 걸 보면 제 생각이 틀리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모는 찹쌀로 빚은 새알심 듬뿍 든 팥죽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이모의 입맛을 기억하는 넉넉한 인심의 주인장은, 새알심을 듬뿍 넣어주는 걸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답니다. 

주인장의 죽 쑤는 솜씨 못지않게 자식 농사 또한 달인급이구나, 느낀 적이 있습니다. 죽 집 대목은 아시다시피 동짓날입니다. 동짓날이 되면 꼭두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좁은 죽 집이 터져라 손님이 온답니다. 그날은 부지깽이라도 세워두고 일을 시키고 싶은 심정인데, 수원으로 시집간 딸이 친한 친구 두 명과 함께 친정엄마를 도우러 내려오고, 서울 사는 며느리도 일손을 보태려 내려온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자식들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애면글면 키웠는데, 시장통에서 죽 쑤는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식들 보면 또 고맙다고 했습니다. 

한데 제가 주인장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새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때였으니 2017년 4월 경이었을 겁니다. 뜨끈한 팥죽이 생각나 죽 집을 들렀더니, 주인장이 언제나처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더라구요. 마침 아들 딸 사위 며느리가 당신 보러 내려왔길래 앉혀 놓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참으로 어지럽고 위태위태하구나. 배울 만큼 배운 너희들도 다 생각이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엄마 뜻을 따라주면 좋겠다. 내가 곰곰 생각해봤는데, 이번에는 ㅇㅇㅇ(후보)를 찍는 것이 좋겠구나.” 

“세상에나, 아드님 따님이 어머님 말씀을 순순히 듣던가요? 반발하지 않던가요?” 제가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웬만한 집에서는 정치의 ㅈ만 나와도 서로 얼굴 붉히며 큰소리 내는 통에 정치 이야기를 금기시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에, 내심 걱정이 되어 물었던 겁니다.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는 모두 ‘예 알겠습니다.’ 그러던걸요?” 주인장 답변을 듣는 순간, 이분은 자식 농사도 달인급이로구나 싶었답니다. 죽 집 주인장의 따스한 미소와 당당한 나라사랑 앞에서 민주주의니 비밀투표니 이런 고상한 개념들이 전혀 힘을 못 쓰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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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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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61.XXX.XXX.219)
죽 달인의 얼굴사진 곁들였으면 글이 더 맛있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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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30 04:57:14
0 0
유근 (220.XXX.XXX.17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런 평범한 분들의 올바른 상식과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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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9 1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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