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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와 삼권분립
이성낙 2023년 12월 01일 (금) 00:01:50

한 해 끝 무렵 11월에, 곧 마지막 달 12월을 맞이한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 일 년을 돌아봅니다. 개인 신상 문제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에 펼쳐졌던 이런저런 일을 생각하면서 가슴 한구석에 검은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국내 사법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혼란스러운 사법부가 있었습니다. 담당 판사가 어떤 정치 성향을 지녔는가에 따라 판결 결과의 유불리(有不利)가 갈린다는 말이 횡행하고, 그 후 나타나는 결과가 그 잡스러운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실망하기를 되풀이한 한 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삼권분립(三權分立) 정신이 크게 훼손된 민낯을 보았습니다. 지난 반세기 우리 사회가 놀랍게 발전한 궤적(軌跡)과 너무 달라서입니다. 

몇 년 전,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2022) 총리가 중대 발표를 하기에 앞서 급히 일본 대법원장을 총리공관에 오게 하여 만난 후 국회에 나가 중대 발표를 하더라는 기사가 독일언론에 보도된 바 있었습니다. 그 ‘만남’을 일본 주재 독일 특파원은 퍽 생소하게 여기면서, 일본에는 삼권분립이란 개념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48년, 독일연방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연방 국회(Bundestag)와 총리관저(Bundeskanzleramt)는  행정수도 본(Bonn)에 두면서도 사법부인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과 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는 본에서 약 290km나 떨어진 남쪽 지역 칼스루에(Karlsruhe)시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의 의미를 잘 아는 독일 특파원에게 일본 총리의 행동은 대단히 생소했을 것입니다. 

1990년 독일이 다시 통일되자, 모든 입법부와 행정부는 서독 시절 수도였던 본을 떠나 새 수도 베를린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사법부는 그대로 옛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적어도 물리적으로 사법부의 독립성이 더 확실해졌다고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그러하기에 독일 특파원에게는 총리가 호출한다고, 대법원장이 ‘쪼르르’ 총리 공관으로 찾아간 사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나 봅니다. 
그런데, 그 독일 특파원이 근래 우리 사법부의 크고 작은 재판 결과가 담당 판사의 정치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끔찍한 ‘먹칠기사 거리’가 될 것 같은 오늘 우리의 상황입니다. 암담합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옛 자료를 살펴보다가 조선 시대 분청사기 사진 한 점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아름다움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미시마다완(三島茶碗) 분청사기(粉靑沙器)
조선 17세기 (Freer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필자는 고려청자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백자 도자기가 지닌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곤 하였습니다. 게다가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의 우리 땅에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분청사기(粉靑沙器)는 필자의 넋[魂]을 사로잡은 지 오래됩니다. 

돌아보면, 고려왕조가 쇠망하고 새로운 왕조 조선조(朝鮮朝)가 등장하면서 사회는 큰 혼란기를 맞습니다. 그 와중에 관요(官窯)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당국은 많은 도공(陶工)을 해직·해산시킵니다. 해직된 도공들은 각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서야 하였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들은 살길을 찾아 나서면서 사요(私窯)를 차립니다. 도공들은 전처럼 관(官)에서 주문받고 생산하던 환경에서 ‘제작과 판매’를 겸해야 하는 아주 새로운 환경에 처합니다. 이는 분명 도공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자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공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자기네 가마에서 자기를 구워냅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분청사기입니다. 15세기의 일입니다.

당시 상황을 상상하여 봅니다. 제작자 겸 판매자인 도공이 어느 날 그의 제품을 소비자인 양반집을 찾아가 제품을 조심스레 내놓습니다. 우아한 고려청자 같은 명품에 익숙했던 구매자에게는 분명 우아하지도 않고, 투박한 질감에 난해한 그림이 그려진 분청사기가 무척 생소했을 것입니다. 분명 별스러웠을 테지요.

구매자는 그 별스러운 분청사기를 보며 조금은 놀라워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관심을 보이고 구매하고 수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분청사기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존재할 수 있던 이유입니다. 한 미술사학자가 “문화는 부(富)유층이 이끈다”라고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세월이 흘러 분청사기와 관련해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1961년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고예술품전시회>에서 분청사기를 처음 본 파리지앵들은 “한국에는 500년 전에 이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있었다.”라고 놀라워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있었기에–최순우를 그리면서》, (진의진, 2017).
 
그리고, 몇 년 전, 이와 맥을 같이하는 논평을 접한 필자는 다시 한번 어깨가 더욱 으쓱해졌습니다. 2011년 삼성미술관 리움(LEEUM)이 주관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The  Metropolitan Museum, New York)에서 전시한 <분청사기전>을 본 한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논평하였습니다. “수 세기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자기가 현대성을 말한다(Vessels of Clay, Centuries Old, That Speaks to Modernity)”라고(The New York Times, April 7, 2011). 그 역시 조선 시대 분청사기에서 현대 미술의 뿌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실로,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줍니다. 청자에 비해 투박하지만 자유분방하고 서민적인 친근감과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가마에서 나온 초벌 사기병을 백톳물에 덤벙 담갔다가 다시 그 위에 거친 붓질로 자국(귀얄무늬)을 그려낸 당시 도공의 더 없는 순수함을 보게 됩니다. 

   
 

왼쪽. 분청사기귀얄문편병(紛靑砂器 귀얄紋扁甁) 조선 16세기 리움미술관 (Leeum Museum of Art)  
오른쪽. 2018. 04. 18.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조선 16세기 33억 원에 낙찰된 15세기 분청사기 편병(扁甁)에 그려진 물고기는 “내 배를 째시오”라고 하듯 벌떡 누워있다.

 

또한 필자가 강조하고픈 것은 많은 외국인, 특히 동양 도예사에 전문성이 많지 않은 문화애호가의 시각에서는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고려청자, 조선백자는 중국 도자기의 아류로 여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조선 분청사기는 한반도에서 15세기에 출현한 우리 고유의 ‘문화 산물’입니다.

분청사기를 만든 도공이 세속적인 질서와 가치관에 매이지 않고 무심한 붓칠 몇 번 함으로써 자유분방한 예술혼이 물고기 문양 등에 반영되었으며 그것이 전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고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처럼 사법부가 어떤 판결을 내리는 데도 세상의 가치관이나 자신의 성향을 벗어나 판결을 내려야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결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시대 하층민 도공도 그런 경지에 이르렀는데 하물며 이 시대 최고 지성인 사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고 묻게 됩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계절에 분청사기에 담긴 순수한 예혼(藝魂)이 발휘되길 기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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