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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DNA
박종진 2023년 12월 18일 (월) 00:00:04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초등학교 1학년 여름, 하굣길이었습니다. 동네 정자(亭子)에서 할아버지 몇 명이 막걸리를 마시다 말고 지나가는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너 이름이 뭐야?” “박종진.”, “박가(哥)로군 박가는 고집이 세지. 근데 최가(​哥)가 더 쎄.”, “알았어 가 봐.”, 그 뒤에도 박가가 고집이 세다는 수도 없이 들었고, 최가가 더 세다는 말 역시 늘 따라왔습니다. 앞니(齒)가 듬성하고 늘 한복을 입고, 바지춤에 부싯돌을 갖고 다녔던 그 할아버지는 강씨(氏)였습니다. 

만년필에도 이런 가문(家門)의 DNA 같은 것이 회사마다 있습니다. 그 중, '고집'하면 몽블랑입니다. 반면 파커는 고집이 없기로 유명합니다. 워터맨은 종가(宗家)라는 점에서 유행을 선도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쉐퍼는 새로운 길은 내가 열어야 한다는 불굴의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창기 만년필 역사에 워터맨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모세관 현상을 이용하여 바로 쓸 수 있는 실용적인 피드를 만들어 만년필 세계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체온 때문에 공기가 팽창하여 잉크가 떨어지는 현상을 해결한 것도 워터맨의 스푼피드였습니다. 한마디로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실용성과 안정성에 관한 만년필 세계의 발명은 워터맨이 주도했습니다. 현재는 당연하지만 잉크를 펜촉에 공급하는 부품인 피드를 펜촉 아래에 붙여 표준을 잡은 것도 워터맨이었습니다. 

워터맨보다 두 번째로 오래된 파커는 고집이 없는 회사였습니다. 파커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보다는 잘 팔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파커는 언제나 예민하게 세상에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유행을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피드를 위로 붙이냐, 아래로 붙이냐로 피드 위치에 대한 표준싸움이 있을 때 오버피드가 앞서면 오버피드를, 언더피드가 승리할 것 같으면 언더피드를 바로 따라하는 발군의 순발력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이 순발력과 유연함이 파커의 유전자였습니다. 결국 이 유전자가 194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파커가 만년필의 제왕에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파커 다음에 제왕에 오른 몽블랑은 굉장히 고집이 센 회사였습니다. 만년필 역사에서 두각(頭角)을 나타낸 업적은 없지만 몽블랑은 한 번 들어온 것은 버리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1924년 시작한 마이스터스튁은 쉐퍼의 보증을 따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쉐퍼의 라이프타임은 이미 흐지부지되어 잊힌 반면, 몽블랑 마이스터스튁은 1999년 75주년이 있었고, 내년인 2024년에 1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만년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투 컬러로 펜촉을 만드는 것도 1931년 쉐퍼가 처음 만든 것입니다. 반면 현재는 역시나 쉐퍼는 투 컬러 펜촉이 없고, 몽블랑의 투 컬러 펜촉은 만년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펜촉으로 정평(定評) 나 있습니다. 몽블랑에 대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클립입니다. 클립 중에 최고의 클립은 파커가 개발한 워셔 클립(washer clip)인데, 몽블랑은 이 클립을 거리감 없이 바로 가져다 사용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적용된 몽블랑 149는 이 시대의 제왕입니다. 

여러 번 언급된 쉐퍼는 한마디로 수비를 하지 않는 공격수입니다. 골을 먹거나 말거나 공격하고 봅니다. 1942년에 나온 쉐퍼의 트라이엄프 펜촉은 파커51의 대히트를 대응하기 위해 나온 것인데, 당시 파커 51 대유행에 맞선 유일한 대항마였습니다. 이 밖에도 쉐퍼가 처음 한 것은 많습니다. 보증의 세계를 열었고, 플라스틱 만년필과 유선형 만년필의 원조 또한 쉐퍼였습니다.

 
(왼쪽)1970년대에 나온 쉐퍼 타가 / (오른쪽) 쉐퍼 타가   

제가 요즘 만년필보다 옛날 만년필이 더 재밌어 하는 이유는,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고집이 있거나 없거나 남이 나와 다르다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 할 때 그 세상이 더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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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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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진 (164.XXX.XXX.146)
요새 80년대 중반 생산된 펠리간 M250을 구하게 되어 빈티지를 처음 경험하는데 생각보다 닙이 두툼하고 기계적 완성도가 최근 펜과 차이가 없어 놀랐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만년필이 발전할 기술적 여지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세월을 견디며 제 손에 들어온 오래된 녀석을 사용하며 이 녀석은 이런 완성도가 있었기에 살아남았구나. 그리고 앞으로도 어쩌면 나보다더 더 오래 살아남겠구나 란 생각이 듭니다. 전 글에서 말씀 주셨듯이 실력만이 살 길입니다. 새해를 열며 다시 다짐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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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11: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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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욱 (211.XXX.XXX.205)
옛 만년필을 알게 되면 만년필의 선택이 풍부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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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9 21: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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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 (116.XXX.XXX.219)
쉐퍼도 재밌고 무엇이든 흡수하는 파카도 재밌네요 ~ 역시 사물에 이야기가 더해지면 관심과 애정이 따라오네요. 우연이라도 손과 손톱에 지우다만 잉크가 묻은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즐거운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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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08: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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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8.XXX.XXX.179)
너무 멋진 감성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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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09: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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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210.XXX.XXX.138)
다양한 DNA를 가진 여러 만년필이 함께 어우러진 시기는 그 자체 만으로도 아름다웠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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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21: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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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8.XXX.XXX.179)
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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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0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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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ie (211.XXX.XXX.212)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기술의 혁신과 유행의 변화에 능숙한 회사가 영원히 업계 1위일 것 같은데, 만년필의 전성기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뚝심의 몽블랑이 꽉 잡고 있다는 게 재밌습니다. 어쩌면 유행한다고 반짝 채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 고집있게 계속 유지하는 게 비결인가도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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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10: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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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8.XXX.XXX.179)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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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0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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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 (220.XXX.XXX.162)
이제 만년필을 쓸때마다 회사의 정신이 떠오를것 같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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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10: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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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8.XXX.XXX.179)
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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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0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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