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사람이 가끔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종종 “덜 자라서 그렇습니다”고 합니다. 서로 웃고 말 수도 있지만 말이 더 이어지면 “그래서 키도 작지 않아요?”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 삼아 하는 말이지만 이런 말을 할 때는 속마음이 따로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이에 비해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남들보다 덜 성숙했다는, 일종의 겸손의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글자 그대로 어린 생각이 많이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린 생각, 달리 말하면 유치한 생각이지요. 예를 들면, 유달리 과거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고 감상(感想)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현실의 생각이나 미래에 관한 생각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멍때리다가 과거 생각으로 시간을 소비하니 고쳐야 하지 않나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특성이 계절이 바뀌는 데 따라서도 나타나니 지나치기까지 합니다. 늦여름 저녁 서쪽 하늘을 볼 때라든가 요즘처럼 차가운 겨울 따뜻한 방안에서 창을 내다볼 때 말입니다. 

경북 상주에 갔던 일이 떠오릅니다. 대학 1학년인가 2학년 겨울방학에 친구 완이와 함께 그의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KTX가 없던 시절이어서 열차 시간은 꽤 오래 걸렸습니다. 그렇게 먼 길을 가는 일은 드물었으니 여정(旅情)으로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거친 금속제의 열차 바퀴가 구르는 리듬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따⸺안 따다다 딴딴, 따다다 딴딴.’ 거기에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리듬과 구절은 기억하는데 더 진척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음악도가 아니어도 그 당시 동요 수준은 만들 수 있었는데 그대로 두고 말았습니다. 

상주에서 3, 4일 묵던 중 영화를 보았습니다. ‘스쿠루지’였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스쿠루지가 유령을 따라다니며 보게 된 직원 가족의 크리스마스 아침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의 어린 막내아들이 ‘아름다운 날’을 노래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과 노래가 오래 기억에 남아 여러 해 지난 뒤 그 노래가 포함된 음반을 사기도 했습니다.

혹시나 하고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니 누군가가 그 영화를 올려놓았습니다.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노래하는 장면을 찾아 다시 들었습니다. 당시와 느낌이 같지 않았지만 노래는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영상을 다시 만난 김에 내용 몇 장면을 더 보니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한 조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보다 며칠 전 모임 참석을 작정하고 나니 모임이 끝난 이후의 기대가 생겼습니다. 늦잠자기가 일상이 된 내가 오래간만에 도심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활기가 전해오리라는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거리 걷기를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어서 세종문화회관 뒤편의 커피 집에 들렀는데 날씨 탓인지 그곳도 분위기가 썰렁하였습니다.

별일 없이 거리 걷기를 좋아한 적이 있었기에 그런 기대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신입 사원 시절에 그랬습니다.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하던 때였지요, 점심 먹고 나서는 종종 종로 거리를 걸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에서 종로2가 네거리까지였습니다. 길거리를 활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갖가지 상점들을 보노라면 활기가 충전되어 왔습니다. 

그 길에서 만난 인켈 점포에서 상담을 여러 차례 한 끝에 가장 싼 값의 단순한 오디오를 사기도 했습니다. 물건을 인수할 때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돈만을 지불하고 나머지 돈은 여러 달 후에 지불하는 조건이었습니다. 명함만 제시하고도 그런 조건이 가능했습니다. 새문안교회 맞은편쯤 되는 어느 점포에서는 LP 음반을 몇 차례 사기도 했습니다. 다른 점포에서는 좀 비싸긴 해도 마음에 꼭 드는 샤프 연필을 만나 평생 즐기는 브랜드로 삼기도 했습니다. 

상주와 스쿠루지가 생각난 건 크리스마스가 다가온 탓인가 봅니다. 출근길 사람들을 쳐다보며 걷겠다는 생각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신입사원 때의 기억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때 좋았으면 됐지, 지금 길을 걸으며 그런 기운을 느껴 보겠다는 건 이상합니다. 감상적이고 과거 지향적입니다.

살면서 이렇게 과거의 기억과 연관되어 생각하거나 그 장소를 찾거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습니다. 잠시 “그런 일도 있었지” 정도로 지나지 않으니 시간 낭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고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름 즐거움을 느끼니 말입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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