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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마지막 겨울방학
함인희 2023년 12월 29일 (금) 00:07:33

다른 사람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자신에게만은 큰 의미로 다가오는 일들이 있습니다. 드디어 학생들 성적표를 제출하면서 시작된 제 인생의 마지막 겨울방학이 바로 그런 일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퇴임을 한 학기 앞둔 지금까지 참으로 오랫동안 방학이 있는 삶을 살아왔네요.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 4년, 박사학위 받고 시간강사 시절 거쳐 구사일생 교수로 여기까지 왔으니, 58년이나 방학을 누려온 셈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줄곧 학기를 잘 보내는 것 못지않게 방학을 어찌 보내느냐에 대학생활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힘주어 말하곤 했었는데, 이제 그 말을 제게 들려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라지는 방학을 대신하여 매일매일이 방학인 삶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인생의 방학을 어찌 보내면 좋을지 고민하면서, 지난 학기부터 틈틈이 연구실 정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9년을 묵혀온 짐 더미가 6평도 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발 디딜 틈 없이 쌓여 있더라구요. 먼저 정기간행물을 모조리 내다버렸습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들, 도서관에서도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논문들, 미련 없이 처분했습지요. 버리는 순간 아쉬워질 거라 했던 선배 교수 말이 귓가에 맴돌긴 했지만, 필요하면 언제 어디서든 온라인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별 문제 없겠지 하면서요. 

뒤를 이어 복사본들이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대학원생 시절, 원서는 값이 비싸기도 했거니와 구하기도 어려웠기에 주로 교수님 책을 빌려 복사해서 공부하곤 했었지요. 영어 단어 찾아가며 색연필로 밑줄 쳐가며 끙끙대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던 복사본들, 비교적 마음 편히 포기했습니다. 멋진 장정의 학위논문도 과감히 정리했습니다. ‘교수님께’로 시작되는 정성스런 메모가 담긴 속지는 따로 모아두긴 했지만, 머지않아 이것도 제 손으로 정리하게 되겠지요. 

책상 옆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유학시절의 노트, 누렇게 변색된 채 남아 있던 시간강사 시절의 강의 노트, 2000년대 들어 PPT가 등장하면서 무용지물이 된 손글씨 노트들, 물론 깨끗이 치웠습니다. ‘나 역시 저장강박증 환자였구나.’ 자책하면서요. 뭐 대단한 것이라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껴안고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대신 동글동글한 제 손글씨가 남아 있는 일기장(한때는 일기를 쓸 만큼 부지런했더라구요)과 수첩은 버릴까말까 망설이다 일단은 종이박스에 보관해두었습니다. 

연구실을 정리하는 동안 잠시 마음을 빼앗긴 채 넋 놓고 앉아있던 순간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하늘나라로 간 친구가 강원도 정선을 여행하던 중 부친 엽서가 책갈피에서 툭 떨어졌을 때, 대학 시절 데모하다 끌려간 남사친이 교도소에서 보낸 손편지 뭉치를 발견했을 때, 정작 친구 얼굴은 잊었는데 멋진 솜씨로 그려 보낸 생일카드가 책상 서랍 구석에서 나왔을 때... 그랬습니다.

연구실 여기저기 보물 상자처럼 숨어있던 사진첩을 다시 펼쳐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요즘이야 스마트폰에 장착된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지만, 필름 카메라로 찍은 후 현상한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자니,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을 떠난 기분이 들었답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지만, 사진은 거짓말 안 한다는 것, 교수 1년차 제 모습 보고 실감했지요. 스승의 날, 사은회 날, 학위수여식 날 함께했던 사진 속 수많은 제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다, 예전엔 스승의 날 행사를 떡 벌어지게 했구나, 학생들과 조사여행도 가고 졸업여행도 갔었네, 새삼 추억에 젖기도 했습니다. 

길고 긴 방학이나 꿀맛 같은 시험기간을 이용해, 훌쩍 떠났던 해외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도 연구실 귀퉁이 서랍에서 잠자고 있었네요. 호주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발칸 반도, 튀르키예 등등,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다녔던 흔적을 다시 보자니, 설렘도 묻어나오고 호기심어린 눈빛도 느껴집니다. 어머나, 만화 고인돌의 작가 박수동 씨 부부와 함께 찍었던 사진도 있었네요. 학교 정문 앞 바둑이네 사진관은 오래전 사라졌는데, 제 연구실에는 미처 정리 못한 사진뭉치가 여럿 나왔답니다. 

이제 남은 한 학기에는 더욱 본격적으로 연구실 정리를 할 생각입니다. 버리는 순간 29년 세월이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아 망설여지는 것들이 슬금슬금 나올 테지만,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했던 박경리 선생님 말씀 되새기며, 비우는 일에 더 과감해지려 합니다. 하나의 끝맺음 속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 또한 기억하면서요. 자유칼럼 독자 여러분,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새해 맞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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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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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련 (125.XXX.XXX.49)
정년 마지 연구실 정리를 잘 하시고 있으시네요. 10년 전 제가 연구실 정리할 때는 바로 다음 일자리 준비 하면서 대충 한 것이 하여 후회 됩니다. 아름다운 새 출발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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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9 14:22:05
0 0
이상훈 (218.XXX.XXX.2)
자유칼럼에서 최근에 읽었던 글 중에 가장 행복한 마음으로 읽은 글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글 읽고 생각해보니 저도 멀 잘 못 버리는 저장강박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정리할 것이 있는지 저도 제 방을 좀 정리해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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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9 09: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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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 (175.XXX.XXX.231)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 더는 글을 쓰지 않겠다며 5천여 권이나 되는 소설책들을 헌칩수집상에게 넘겼던 기억이 떠 오릅니다. 책을 살 때는 한권, 한권 감동을 받았던 책들이었는데 트럭에 실려가는 책들은 그냥 헌책들이더군요. 훗날 생각해 보니 그래도 그 책들이 제게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교수님도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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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9 08: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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