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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리 이원익을 기리며
임철순 2024년 01월 24일 (수) 00:00:14
    
  오리 이원익 초상.
일본 텐리대(天理大) 소장.
 

완평(完平)부원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88세 생애 중 40년 가까이 전·현직 재상으로 일한 큰 인물입니다. 광해군 때 영의정이었는데도 반정으로 그를 내친 인조 때도 영의정으로 기용될 만큼 인망이 높았습니다. 그의 관직생활은 애국과 애민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그가 다른 선비들과 뚜렷이 다른 점은 학식과 시문에 기대어 벼슬을 산 게 아니라 민생을 위해 현실적 방략을 입안하고 실행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완평은 학문이 부족한 게 유일한 단점”이라고 하자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은 “완평의 학문은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상촌은 ‘한문 4대가’로 불릴 만큼 문장과 학식에 정통했던 분인데, 그의 평가가 적실합니다.

관직생활 초년에 황해도 도사(都事)에 임명된 오리는 군적부 정리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상관이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눈에 들었고, 율곡은 그를 홍문관 관리로 추천했습니다. 평안도 안주목사 시절의 업적은 “정승으로서의 명망은 안주에서 비롯됐다”(선조수정실록)고 평가될 만큼 뛰어났습니다. 지방관에 임명되면 며칠이고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거나 접대를 받고, 그러면 임지의 아전들이 찾아와 그동안 쓴 비용을 대신 내주고 모셔가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리는 임명된 다음 날 혼자 말을 타고 안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바로 1만 석의 곡물을 대출받아 풀었습니다. 

누에를 키우는 양잠도 적극 권장해 대대적으로 뽕나무를 심게 했습니다. 몇 해 안 가 안주에 숲을 이룬 뽕나무를 사람들은 이공상(李公桑, 이원익 상공의 뽕나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공상은 오리의 사후에도 안주 백성들의 생계를 떠받친 밑천이 되었습니다. 또 아전들이 담당하던 전세(田稅) 운반을 자신이 직접 수행함으로써 쌀을 필요 이상으로 더 거둬들이던 비행을 불식하는 행정개혁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임란 이후 조선 최대의 국정개혁은 대동법 시행이라는 세제개혁이었습니다. 대동법의 출발은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시작된 경기(京畿)선혜법이었고, 경기선혜법을 강력 주장한 사람이 바로 오리입니다. 선조 때부터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이라며 세금 부담을 줄여줄 것을 상소한 덕분에 광해군 즉위 한 달 뒤 경기지역을 대상으로 공물(貢物) 개혁을 실행하는 경기선혜청이 발족될 수 있었습니다. 

인조반정 후에도 오리는 삼도(충청 전라 강원)대동법 추진을 주장했고, 그 추진기관으로 재생청 설치를 주도했습니다. 재생(裁省)은 국가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삭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삼도대동법은 쉽게 정착될 수 없었고, 기득권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민생정치만큼 중요한 업적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을 구한 것입니다. 임란이 한창이던 1596년 선조가 이순신의 됨됨이를 묻자 오리는 원하는 대답과 정반대로 "장수 가운데 가장 쟁쟁한 인물이며 경상도 주둔 장수들 중 가장 훌륭하다"고 답했습니다. 다음 해 이순신이 명령 불복종으로 하옥됐을 때는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처벌을 강력 반대했습니다.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수군이요, 수군이 믿는 사람은 순신입니다. 순신은 움직여서는 안 되고 원균(元均, 1540~1597)은 써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본받고, 분수와 복은 나만 못한 이들과 비교하라"는 오리 이원익의 당부.
필자의 졸필.
 

선조가 이순신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아 조선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으로 오리의 큰 공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순신을 천거했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당시 정치적 공격대상이 되는 바람에 이순신 구하기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리는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한 사람입니다. 광해군이 모후인 인목대비를 폐할 때는 목숨을 걸고 반대 상소를 했다가 3년 반 정도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인조반정 직후 영의정으로 복귀해서는 광해군을 죽이자는 주장에 단호히 맞섰습니다. 그가 강화도로 유배를 가는 날, 오리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송하러 나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자신의 죄라며 미안해했고, 광해군은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고 합니다. 

오리는 정치적 사건에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입니다. 귀양 가 있는 오리를 죽이자고 했던 이이첨(李爾瞻, 1560~1623)조차 인조반정 직후 참형을 당하게 되자 "완평이 정승에 복귀되었다면 우리 일족은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오리가 서울로 돌아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합니다. ​

탁월하고 유능한 행정가이면서 온화한 인품이었던 오리의 미담은 끝이 없습니다. 젊어서부터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임란 시기 명나라와의 외교나 명나라 장수들 응대 업무를 차질없이 수행했습니다. 오래 재상을 지내고도 청렴하고 가난했던 오리는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본받고, 분수와 복은 나만 못한 이들과 비교하라.”[志行上方 分福下比]는 말도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남긴 글 '서시자손(書示子孫)'. 필자의 졸필.  

나는 2012년에 이미 ‘오리 이원익을 기리며’라는 글을 쓴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또 오리 이야기를 한 것은 그의 몰랐던 면을 새로 알게 된 데다 유능하면서도 맑은 인격이 그때보다 지금 더 그립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은 최근 출간된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활동’(이정철 지음)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기획한 전통생활사총서 중 하나입니다. 오리는 더 많이, 더 널리 알려져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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