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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렬한 배트맨
신아연 2008년 07월 29일 (화) 01:35:03
지난 주말에 아들아이와 함께 영화 배트맨 시리즈 <다크 나이트(Dark Knight)>를 보러 갔습니다. 호주에 살면서 극장을 가는 일은 내 돈 내고 고문을 당하러 가는 것과 같습니다.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기 때문에 극장에 앉아있는 자체가 괴롭습니다. 그러다보니 영화에 몰입하지를 못하고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됩니다.

악의 화신이 한바탕 유혈극을 벌인 후에 드디어 배트맨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영웅은 너무너무 멋있다 못해 목소리에까지 힘이 팍팍 들어가 있습니다.

배트맨이 누구인지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는 그 순간, 예의 짓궂은 딴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배트맨이 잔뜩 폼을 잡으면서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그걸 제대로 못 알아듣겠다보니 배트맨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천 베일이 얼마 전, 61살 모친과 40살 누나를 때리고 학대한 죄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민망한 신문보도가 느닷없이 생각납니다.

정의 그 자체인 배트맨이 실제 생활에서는 야비하고 비열하고 치사하게 굴었다는 것이 망측스럽고 어처구니없어 실소가 나옵니다. 당황한 ‘배트맨’은 ‘집안 일’ 로 일축하면서도 ‘상당히 쪽팔려 했다’는 후문이 들리는 걸 보면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특성을 제대로 알기는 알았다는 뜻이겠지요.

말을 타다 떨어져 전신불구가 되어 끝내 죽음을 맞이한 ‘슈퍼맨’의 아이러니는 또 얼마나 면구스럽습니까. 하늘도 붕붕 날 수 있는 슈퍼맨이 그까짓 말에서 떨어져 죽다니 말이죠. 배트맨, 슈퍼맨 같은 세계적 스타뿐 아니라 우리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걸 이따금 느낄 때가 있지요.

수사관 역할을 맡은 사람이 녹화를 마치고 집에 가다가 음주 운전이나 경범죄로 걸릴 때, 청순 가련형 이미지의 여배우가 문란한 사생활로 구설수에 오를 때의 묘한 배신감 같은 것 말입니다.


뭐 그렇다 한들 ‘졸렬한 배트맨’을 비롯해서 그런 일들쯤이야 얼마든지 웃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굳이 탓을 하자면 극중 이미지와 실체 사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감과 악의 없는 이중성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배반의 현실 혹은 드러난 실상 가운데는 씁쓸함과 당혹감이 지나쳐 찜찜함을 오래도록 떨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평소 중후한 인품과 신뢰감 가는 배역만 수십년 맡아오던 중견 배우가 겸업으로 사기성이 농후한 사업체를 꾸리다 구속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 배우의 지금껏 연출된 이미지와 드러난 실체의 틈바구니에서 오는 감정 혼란의 파장이 ‘망신살 뻗친 배트맨’과는 좀 다르지 않은가요.

<나도 상류층과 결혼할 수 있을까, 배경과 능력 테스트로 자가진단을 받아보자. 테스트 1, 부모님의 최종 학력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인가? 테스트 2, 부모님의 직장과 직위는? … > 인터넷을 통해 한국 신문에서 이런 천박한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서민의 등긁이’라 불리던 한 라디오 방송의 인기 진행자로, 시민 운동가로, 예술가로 활동하며 전직 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이런 광고를 내고 중매쟁이로 변신한 모습이 너무 생경하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그이의 변신이 위선이랄것까지는 없지만 왠지 일탈된 정체성을 보는 것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왠지 속은 것 같고 배신 당한 것 같아서 불쾌하고 허탈한 이런 유의 이중성, 혹은 괴리감은 ‘치졸한 배트맨’이나 ‘말에서조차 떨어져 죽는 무능한 슈퍼맨’, ‘교통 법규 위반 수사관’이 빚어내는 이중성과는 아주 딴판으로, 우습기는커녕 우울하고 음습함만 자아냅니다.

허구가 아닌 현실의 삶에서는 연출된 이미지나 허상에 대응하는 실제와 본질 간의 괴리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사회는 병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잘 닦아놓은 이미지를 내세워 치부를 하거나 대중적 신용을 역이용하는 따위를 헛헛하게 지켜보노라면 막연히 공허해지고 때때로 분노가 치밀기도 하는 사회적 홧병 같은 것 말입니다.

영화의 대사를 못 알아듣다 보니 지루해진 제가 생각을 지나치게 비약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사 그 영화는 무려 2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끝났으니까요.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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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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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temology (80.XXX.XXX.53)
필자는 영화를 평가 하는 것도 아니고, 배우의 연기력에 문제를 삼는 것도 아니라, 단지 배트맨 영화를 보았는데, 사건의 진실여부를 떠나서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감을 소재로 글을 쓴겁니다. 그러나 배우들의 그런 것들과는 달리 공직자들의 이중성을 볼때는 매우 우울해 지더라는 말. 근데 ㅋㅋ 자기 외국어 책 많이 읽는다는 말은 왜 하며; 주연배우 정신과 분석과 변명까지.글의 요지를 파악하고 읽으면 즐거움은 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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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2 17: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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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시장 (211.XXX.XXX.34)
그러나 "옳은 스펙트럼"은 없고 "다른 스펙트럼"만 있다고 해도, 여러 채널을 통한 사실의 확인은 "다른 스펙트럼들에 대한 평등하고도 열린 수용의지"와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건데, 히스 레져도 크리스챤 베일도 매우 훌륭한 배우이며, 그렇기에 많은 오해와 루머에 시달리(렸던)는 사람들입니다. 고담시에서 사는 브루스 웨인(배트맨)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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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9 12: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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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시장 (211.XXX.XXX.34)
무엇을 비판하든 비평하든 단순히 전달만 하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논리는 통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글"이라는 포맷은 그런 면에서 아주 쉽게 화자를 '벌거숭이'로 만들 수 있지요. 자기가 어떤 '프리즘'이냐에 따라 그 스펙트럼에 큰 차이가 있겠지요.한 영화가 어떤 이들의 눈엔 "폭력물"로 보이고, 어떤 이들에겐 "철학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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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9 12: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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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시장 (211.XXX.XXX.34)
죽어마땅한(?) 범죄자와 "저들이 죽어 마땅하다"라고 말하는 '선량'한 일반인들 중 누구를 살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리며, 그와 동시에 누구를 고르든 '인간의 생존 본능과 그 정당성으로 가려진 [잔혹성]은 범죄자와 일반인 이하 배트맨까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다'는 논리를 Joker는 펴고 있습니다. 이 정도 설명만으로도 '이해하지 못하여 지루한'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생각을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인지 이해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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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9 12: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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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시장 (211.XXX.XXX.34)
이번 배트맨은 여느 배트맨 시리즈와 달리,단순히 "악의 등장-선의 응징" 구조를 넘어서서 '악/범죄자' '방관자' '절대자' '조롱자'의 성격을 지닌 Joker라는 캐릭터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본성을 성찰하는, '히어로 물을 넘어선 철학 영화'라고 할만 합니다. 철학과를 나오신 분이니, 저는 조커가 범죄자와 일반인을 둘다 배에서 인질로 잡고 선택케하는 씬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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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9 1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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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시장 (211.XXX.XXX.34)
다음으로, 크리스찬 베일의 경우 조커(joker)역을 맡은 동료배우 히스 레져의 사망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매우 컸습니다. 현지에서도 히스 레져의 자살도 매우 큰 충격이어서 이성을 잃을 만한 것이라고 납득되는 분위기 입니다. 유작이 되어버린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레져의 joker는 이전에 잭 니콜슨이라는 대배우의 족적에 도전하는 셈인데, 경의를 표할 만큼 '필적' 혹은 어떤면에서 '능가'하는 joker를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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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9 12: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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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시장 (211.XXX.XXX.34)
대사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한 관람자에게 심도 있는 딴지 혹은 반박은 굳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바,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영화에 대한 작은 의견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선 크리스찬 베일의 존속상해 사건은 제가 알기로는 루머이며, 확실히 자신의 누이와 어머니를 폭행했다는 증거도 없고 무혐의 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팬들에게 "배신감"을 줄만한 일이라 소문이 빨리 퍼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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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9 12: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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