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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애를 찾아서 (중)
임철순 2008년 10월 27일 (월) 02:28:34
아버지와 아들

2주 전 10월 13일에 쓴 ‘蒼厓(창애)를 찾아서’의 두 번째 글입니다. 창애 유한준은 30대에 아들을 잃고, 50대에는 아들을 잃은 아들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가 연암 박지원의 집안과 다툴 만큼 산소 문제에 그토록 민감했던 이유는 가족의 잦은 죽음 때문으로 보입니다. 산소는 發福(발복)의 근원이라는 생각, 우환을 끊어 자손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풍수지리와 묏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도 문집 <著菴集(저암집)>에서 “禍福擇地說(화복택지설)이 성현의 경전에 나타나지 않고 禍福으로 유혹하는 地師들에게 놀아나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지만, 풍수설 자체는 거부하지 못했으니 개인의 문제를 떠나 시대의 한계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32세에 잃은 첫 아들 冕柱(면주)는 당시 겨우 6세였으니 언급할 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창애가 55세 때인 1787년에 15세로 숨진 두 번째 손자 久煥(구환)은 집안의 자랑이자 희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손자가 죽은 다음해에 아들인 通園(통원) 兪晩柱(유만주ㆍ1755~1788)가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즈음이 창애에게는 삶의 큰 고비가 됩니다. 구환은 아버지 할아버지를 모시고 학문과 문장을 문답할 만큼 총명했는데, 어려서부터 병약해 오래 살라는 뜻에서 元視(원시)라고 字를 고쳐주기까지 했으나 스무 살도 못되어 숨지고 말았습니다.

   
  <흠영> 영인본 중 일부(1997년 서울대 규장각)  
유만주는 20세가 된 1775년 1월 1일부터 사망 1년 전인 1787년 12월 14일까지 13년 동안 일기를 썼고, 이 일기는 사후에 <欽英(흠영)>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엮어졌습니다. 아들이 죽은 지 1년 뒤에 아들을 따라가듯 사망한 유만주는 아들의 사망 직후 이렇게 일기에 썼습니다. “내가 어질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며 행실이 신명을 저버렸는지 금년 여름에 대를 이을 자손에게 화가 미쳤으니, 원시가 병으로 죽었다. 아아! 나는 실성하여 하늘에 물어보지도 못하고 하소연하지도 못했다. 곡을 마치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가 죽었으니 이제 이 책은 후세에 전해질 수 없다. 고치고 다듬어 정리해 줄 사람도 없다. 이제 책 쓰는 것을 중단해야겠다. (중략) 아아, 슬프다! 아아 애석하구나!”

그가 일기를 쓴 이유는 자식에게 물려 주어 博聞多識(박문다식)의 자료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에게 노비와 전답을 나눠 주고 금은보화와 물건을 주는 것보다 일기를 물려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던 유만주는 일기 쓰는 일에 태만하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해서만 하는 일이 아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가까운 일은 상세하게 하고 오래된 일은 헷갈리지 않게 하고 먼 일은 잊지 않게 하여 훗날 살펴보는 데 대비한다는 게 일기를 쓴 취지였습니다. 스스로 박문다식의 자료라고 말했듯 <흠영>에는 수많은 책을 읽은 기록과 집안의 대소사, 당시의 사회상이 두루 담겨 있습니다. 그는 놀라울 정도의 독서인, 평론가, 교양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몸이 약해 늘 치질과 눈병에 시달렸고, 여름에는 소화기 계통의 위병, 설사병을 자주 앓았습니다. 몸이 아프면 며칠씩 의관을 정제하지 못한 채 방안에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창애의 외아들인데도 요절한 백부의 양자로 입적됐던 유만주는 13세에 장가 들어 19세에 첫 아들을 얻었으나 곧 부인과 사별했습니다. 사망 직전에는 일기를 태워 버리라고 아버지께 부탁했지만, 아들의 분신과도 같은 일기를 태울 수 없었던 창애는 아들의 벗에게 초고를 정리해 책으로 내도록 했습니다.

<欽英日記序(흠영일기서)>에 창애는 이렇게 썼습니다. “죽을 때 아비를 보고 말하였다. ‘일기는 제가 완성하지 못한 책입니다. 부디 태워 버리십시오.’ 나는 책을 잡고 울면서 말하노라. 이것은 내 아들의 정신 志業(지업) 名理(명리) 언론 識趣(지취)가 모인 것이다. 책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어찌 버려둘 수 있으랴!” 아들의 제문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정신이 없고 성품은 경솔한 데다 글자가 들어올 때마다 눈물이 솟아나와 종이에 떨어지니 이 때문에 종이가 문드러졌다. 책을 놓아 버리고 차마 읽을 수가 없었으며 덮어버리고 차마 열어볼 수가 없었다.”

사랑하고 기대했던 아들을 잃은 유만주의 실의와 낙담은 고스란히 창애에게 옮겨졌습니다. 연암 식의 표현을 빌리면 ‘마음이 재가 되어’ 그 뒤로부터 10여 년 동안 刻意(각의)하여, 즉 공들여서 시도 짓지 않았고, 삼척부사 청주목사 등의 벼슬을 그만둔 다음에는 여러 지기와 시모임을 가지며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창애는 당시로서는 고령인 여든 살(우리 나이)까지 살다 갔는데, 참척을 당한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아들과 손자의 목숨까지 빼앗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만주는 연암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흠영>의 1785년 11월 13일자 일기에는 “달이 매우 밝고 추운 날, 아버지와 함께 연암의 문장을 논했다. 문장은 아주 뛰어나지만 사람됨은 아주 잡스러우니 매우 애석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穢德(예덕)선생전’ ‘양반전’등 연암의 초기 소설 아홉 가지(이 중 두 가지는 유실)가 수록된 <방경각외전>에 대한 언급은 이렇습니다. “하나의 기이한 문장이다. (중략) 형용이 이처럼 핍진하여 스스로 古文(고문)을 이루니 하늘이 주신 기이한 재주가 아니면 가능하겠는가? 이 글은 作用(작용)에 뛰어나서 걷지 않고도 달려가며 옛사람들이 남긴 찌꺼기보다도 이 글에 미치기가 어렵다. (중략) 자신을 검속하는 방법을 행한다면 크게 뜻을 이룰 것이다.”

연암의 소설 <虎叱(호질)>을 읽어 보라며 친구에게 빌려주기도 했던 유만주는 ‘文則絶等 人則絶雜(문즉절등 인즉절잡)’이라고, 연암의 글은 높이 쳐주면서도 세상을 가벼이 여기고 얽매이지 않는 그의 태도를 나쁘게 평가하면서, 자신을 단정하게 수양하는 게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에 대한 창애의 구체적 발언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들과 같은 생각이었을 것으로 보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연암이 보낸 편지 答蒼厓(답창애) 4에는 유만주가 연암을 찾아와 글 짓는 것에 대해 묻기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라”고 일러 주었더니 자못 기뻐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어 연암은 “아침 저녁 문안을 여쭐 적에 그 말을 하던가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전후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고 연암 특유의 반어나 익살로 해석할 수도 있는 편지이지만, 어쨌든 <방경각외전>에 대한 창애 부자의 비우호적인 언급은 답창애 4보다 나중의 일로 보인다고 합니다.

연암이 유만주에게 해 준 말의 본래 뜻은 아마도 문장의 기교를 향상시키기보다 마음자리를 바로 갖는 공부가 먼저라는 것이었을 텐데, 유만주로서는 문장의 방법을 묻는데 엉뚱한 대답을 하니 무시하고 놀리나 싶어 화가 나서 돌아갔을 터이고, 연암은 그 일을 편지로 다시 물은 것이라고 해석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 다음해의 일기(1786년 11월)에서도 유만주는 연암의 재주가 貫華(관화)의 문장에는 뛰어나지만 純古(순고) 正大(정대)한 문자에는 모자란다고 평했습니다. 道(도)를 꿰는 것이 아니라 華를 꿴, 그러니까 내용은 없고 소설적 흥미만 추구했다는 뜻입니다. 이 때는 연암의 <열하일기>가 완성돼 베스트셀러가 된 지 3년이 지난 시기였는데도 유만주의 평가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만주의 일기 중 秦漢(진한)의 古文만을 답습하지 말고 ‘지금, 여기’의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나 문장에서 방언과 俚語(이어)를 피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는 마치 연암의 글쓰기 이론을 듣는 것처럼 일치합니다. 유만주는 그런 생각에서 소설도 열심히 읽었고 설화 야사 야담등 우리의 俗文化(속문화)를 중시했습니다. 그런 인물이었으니 그의 사망 14년 후인 1802년에 벌어진 연암 집안과의 묏자리 싸움도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거나 발생했더라도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학자도 있습니다.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유만주는 과거에 몇 차례 떨어진 뒤 연암의 생각과 비슷하게 과거제도의 폐단과 문란함을 지적하고 인재 등용방식을 천거로 바꾸자고 주장하면서, “벼슬로 인품을 논할 수 없다”거나 “생원 진사가 인생의 성공이라니 인생이 참으로 가소롭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일기 제목 <흠영>에는 시대에 대한 비판과 개인의 인격적 성취에 관한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삼국지연의>의 삼고초려 대목에 나오는 시 중에서 高談王覇驚人耳 輟洗延坐欽英風(고담왕패경인이 철세연좌흠영풍), 고양땅 출신 역이기가 한고조 유방을 찾아갔을 때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게 한 채 일어나 예의로 대하지 않는 무례를 꾸짖자 씻던 것을 그치고 상좌에 모셔 사과했다는 이야기, 곧 그 영특한 모습을 존경했다는 데서 따온 게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인천대 조현우 교수). 유비가 제갈공명을 찾아가다가 만난 제갈공명의 친구 石光元(석광원) 孟公威(맹공위)가 읊는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을 아주 좋아했던 유만주는 <삼국지연의>를 “4대기서 중에서 매우 훌륭하니 마땅히 소설 중 으뜸”이라고 말하며 저자 羅貫中(나관중)을 영웅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 아들을 창애는 연암과 달리 일찍 잃었습니다. 연암의 장남 宗儀(종의ㆍ1766~1815)는 49세로 사망했지만 아버지보다 나중에 죽었고, 2남 宗采(종채ㆍ1780~1835)는 연암이 타계한 지 11년 뒤(1816년) 아버지의 행장을 엮어 기록한 <過庭錄(과정록)>을 남겼습니다. 過庭은 공자가 뜰을 지나가는 아들 伯魚(백어)를 불러 세우고 詩와 禮를 배우라고 했다는 <논어> 季氏篇(계씨편)의 고사에서 따온 말입니다. 그 책은 연암의 생각과 삶을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아버지를 적극 변호하고 두둔하고 홍보하는 문서이기도 합니다. 반면 창애는 자신의 글 외에는 달리 더 그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가 아주 부족합니다.

연암의 한 편지에는 아버지의 3년상을 막 마쳤을 때, 네 살 된 장남 종의가 “나는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는 왜 아버지가 없나요? 아버지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나요? 아버지도 일찍이 젖을 먹고 크셨나요?”하고 물어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무릎에서 밀쳐 버리고 목놓아 한참 울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연암은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약에 타기도 했던 분입니다. 아버지를 여읜 자식의 슬픔이 그와 같은데,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낙담과 절망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아들에게 아버지는 때로 저항과 극복의 대상이지만, 아버지에게 아들은 다만 사랑과 기대, 願望(원망)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창애가 비탄에 젖어서 쓴 아들의 제문에는 “(너를) 알아주지 않는 자가 알아주지 않는 것이야 무슨 해가 되겠느냐? 그러나 후세에 알아줄 자가 알아주지 않을까 마음 아프구나. (중략) 지금 내가 너의 서적들을 갈무리하고 또 그 묘에 쓰기를 通園 兪氏자제의 묘라고 하여 달리하는 것은 후세에 어떤 이가 너의 애석함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나를 알아 주는 것, 그것은 1차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겠지만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훌륭해져서 以顯父母(이현부모)하는 것이야말로 더 보람 있고 기쁜 일이었을 것입니다. ‘흠영’이라는 말에는 조선시대 사대부집안 아버지와 아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바람은 사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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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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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02.XXX.XXX.26)
여러 천재들의 개성들이 잘 드러난 빼어난 글입니다. 그렇지만 풍랑을 헤쳐 한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것 또한 그들의 몫이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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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8 20: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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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기 (211.XXX.XXX.129)
느리게 가고 싶은 삶의 길을 안내하는 글입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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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16:33:38
0 0
월담 (211.XXX.XXX.86)
흥미진진하네요. 창애나 만주가 연암에게 하고 싶은 말을 도리어 연암이 만주에게 들려주고, 만주는 머리를 흔들며 물러나고...다음 얘기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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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1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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