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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임철순 2009년 02월 09일 (월) 01:50:01
한국인이 자녀들에게 많이 붙이는 이름을 대법원이 최근 공개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60년 동안의 선호도 변화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가장 인기가 높은 남녀 신생아의 이름을 10년 단위로 살피면 1948년 영수 순자에서 1958년 영수 영숙, 1968년 성호 미경으로 각각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978년에는 크게 달라져 정훈 지영이 가장 많더니 1988년엔 지훈 지혜, 1998년엔 동현 유진, 이어 2008년에는 민준 서연으로 집계됐습니다.

학술적으로 분석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1968부터 1978년까지 10여년 동안에 한국 사회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각, 가치관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선호하는 이름의 변화로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역동적인 시대였고, 사회가 급변하고 발전속도가 매우 빠르던 시기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남자의 경우 빈도가 높은 게 1948, 58, 68년에는 영수 영호 영식 영철, 이런 이름이었지만 1978년이 되면 ‘영’자 이름은 10위 안에 끼지도 못합니다. 여자는 순자 영자 정순 정숙 영숙 영순, 이런 전통적인 이름이 1968년에 이미 인기가 떨어져 1978년이 되면 10위 안에서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철수와 영희부터 이름이 나오지만, 그 이름은 생각만큼 인기가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현재 가장 인기있는 남아 이름 민준과 여아 이름 서연은 모두 2위와 큰 차이가 날 만큼 선호도가 높은데, 2005년부터 이 경향이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개그우먼 박경림도 올해 1월에 아들을 낳고 민준이라고 했더군요. 주목할 것은 남자에는 ‘준’, 여자에는 ‘서’자를 많이 쓰는 점입니다. 남자 1~10위를 열거하면 민준에 이어 지훈 준서 우진 예준 현준 건우 준혁 민재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자 1~10위는 서연 지민 민서 서현 서윤 예은 수빈 하은 지우 윤서입니다.

답답한 것은 그 이름들의 한자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하도 한자를 쓰지 않아 같은 ‘민준’이라도 부모가 무슨 맘을 먹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아는 민준이라는 사람의 한자는 旼(온화할 민)俊(준걸 준)으로 돼 있는데, 그 밖에 敏(민첩할 민)俊, 珉(옥돌 민)埈(높을 준), 旻(가을하늘 민)俊 등 숱한 민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름에 '준'이 들어가면 뭔가 좀 안정된 것 같고 남자로서 믿음직스럽고 올바르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사실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인상과 느낌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선호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인 인상을 추가하면, '미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에게는 정말 미안/죄송하지만 그 이름을 보면 뭔가 좀 얄미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최근의 어느 보도에 의하면 박점순이라는 59세의 여성이 이름을 정아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딸의 결혼식 때 청첩장에 인쇄된 자기 이름이 너무 촌스럽게 느껴져 법원에 개명 신청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름을 바꾼 사람이 작년 한 해 동안에만 14만 6.871명이었습니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50대 이상 신청자가 늘기 시작해 요즘은 열 명 중 한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나이까지 살고도 개인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늘어날 만큼 세상이 달라진 셈이지요.

부모는 누구나 특정한 개인적 사연이나 바람을 담아 자녀의 이름을 짓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200만원만 있으면 좋겠다고 한탄했던 사람이 아들의 이름을 李百萬(이백만)이라고 지은 경우가 있습니다. 또 구체적 사연은 잊었지만 일제 시대의 돈 300원을 한 자씩 넣어 李鎭三(이진삼) 李鎭百(이진백) 李鎭元(이진원)이라고 3형제의 이름을 지은 아버지도 있습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아들을 기다리던 선비가 딸을 보게 되자 좀 실망해서 一女(일녀)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두 번째에도 딸이 나왔습니다. 또 딸이야? 그런 뜻에서 二又(이우)라고 했답니다. 그 부인은 참 주책이지, 셋째도 딸이었습니다. 선비는 이건 좀 너무한데 하는 마음에서 三過(삼과)라고 했다네요. 그런데 그 여자는 정말 끈질기기도 하지, 네 번째에도 딸을 낳았습니다. 화가 난 선비는 이걸 어디다 쓰느냐(내다 버려라)고 四何(사하)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 뒤에 아들 낳기에 성공했는지, 그런 이상한 이름들을 집안에서 그대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자기 이름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어려서 내 이름이 아주 싫었습니다. 한자로는 喆淳이지만 淳자가 여자 이름에 많이 쓰는 順과 발음이 같아서 여자 이름이라고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순이 순이 철순이 장가 장가 들었다 누라 누라 마누라 개다 개다 두 개다"라고 떼지어 노래 부르며 나를 놀렸습니다(천하의 못된 놈들!). 우리 아버지가 서울 가서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빗대 놀리는 노래를 만든 것인데, 그런 놀림을 받을 때마다 내 이름이 더욱더 싫었습니다. 항렬자가 鎬(호)-宰(재)-淳(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 뿐이지만 아이들이야 그게 무슨 상관 있었겠습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내 짝은 이름이 임철수였습니다. 철수의 한자는 잊었는데, 나는 任이고 그는 林이어서 성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름이 비슷해서인지 그 애 철수가 날 놀리는 아이들을 많이 말려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 아들 대의 이름에는 彬(빛날 빈)자가 들어갑니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아버지가 "빈 자는 소리가 약하니 창 자를 넣어 昌彬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지만, 나는 '창'자의 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고 아버지 말도 따르기가 싫어서 무시하고 내 멋대로 和彬(화빈)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유명 작명가 김봉수씨를 찾아갔는데,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름을 지었느냐"고 면박을 주더니 浚植(준식)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습니다. 植자도 돌림자로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때도 그곳에 찾아가 晟植(성식)이라는 이름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첫째 녀석은 요즘 유행하는 '준'자가 이름에 일찌감치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 말이 없는데, 둘째는 제 멋대로 彬자를 끌어다가 성빈이라는 이름을 따로 혼자서 지어 책에 써 넣곤 했습니다. 그 글자가 좋다는 것입니다. 나도 지금은 그 글자가 좋아졌습니다. 뭔가 기품이 있는 것 같고 단정해 보입니다.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속내가 잘 어울린다는 文質彬彬(문질빈빈)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창빈이라는 이름도 힘있고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에 100% 만족하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쨌든 누구나 자기 이름을 닮아갑니다. 얼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기 이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청마 유치환의 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에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마침내 비굴한 목숨은/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나의 노래는/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 않으리'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름이 목숨보다 귀하고 높다면 세상을 바르게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무엇이든 사회와 나라를 위해 기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름을 아껴야 합니다. 아울러 남의 이름도 아껴 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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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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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211.XXX.XXX.129)
하하 농담이고요. 저희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버리는 용기가 있었다면 지금 '형아'라는 좀더 세련된 이름을 가졌을텐데...어려서 원망 많이 했습니다. (헌데 주필 댁은 할아버지 작명이 더 세련돼 보이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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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11: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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