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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이야기
최병상 2009년 03월 31일 (화) 08:16:03
유난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즈음 해어름엔 벌통을 순회하며 낙봉을 줍습니다. 예년보다 벚꽃이 10여일이나 빨리 핀다는 기상청의 예보를 증명이나 하듯 때 이른 개나리 진달래가 매화와 함께 만개하여 꿀벌들의 나들이가 부쩍 잦아졌습니다. 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제철을 만난 녀석들이 양쪽 발에 하얗고 노오란 꽃가루를 잔뜩 뭉쳐 소문으로 날렵하게 들어가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꽃가루 색깔로 그들이 다녀온 사냥터를 가늠해봅니다. 하얀 꽃가루는 이웃마을 친구네 매화 밭이나 냉이밭에서, 노오란 꽃가루는 동백숲이나 오리나무에서 묻혀 온 게 분명합니다. 너무 먼 곳을 갔거나 욕심껏 뭉쳐온 녀석들은 지쳐서 쉬었다 가려고 집근처에 앉습니다. 기온이 따뜻할 때는 다시 날아서 집으로 가지만 기온이 떨어지는 해어름엔 저체온증으로 몸이 마비되어 눈앞에 집을 두고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녀석들을 낙봉이라고 합니다.

녀석들을 그대로 두면 밤을 맞아 동사하게 됩니다. 미물이지만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주워서 종기에 담아 이불 속에 넣었다 다음날 정오쯤에 놓아주면 기분 좋게 날아 제집으로 갑니다. 바라보는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벌 쏘인다고 질겁하지만 꿀벌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며 밀어붙였더니 이제는 말리는 일을 포기해 방해받지 않고 낙봉 구제(?)사업을 계속합니다.

이렇게 구사일생한 녀석들이 주인의 미덕(?)을 소문냈는지 지난해엔 약했던 벌들이 강해져 꿀도 많이 채밀했고 분봉도 잘 되어 일거양득을 했습니다. 올해엔 모두 강군이지만 낙봉구제를 계속하는 건 얄팍한 보응을 바래서가 아니라 녀석들을 인격체로 대하고 싶고, 죽게 방치하는 것은 주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꿀벌들을 대하면서 찬찬이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촛불집회때 상종가를 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우리 헌법 제1조 1항을 딱 부러지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꿀벌 나라는 한 마리의 여왕벌을 정점으로 2만 마리 내외의 일벌, 1백여 마리의 수벌로 이루어지는데 정작 중요한 결정은 모두 일벌들이 하고 여왕벌은 그 결정을 거스르지 않고 따릅니다. 식구가 불어나 분가해야겠다 싶으면 왕안을 지어놓고 여왕벌로 하여금 왕대를 산란케 합니다. 새 왕이 태어나기 이틀 전인 14일째에 분가를 하는데 먼저 자리벌(척후벌)이 1차 머무를 곳을 탐지하고 돌아오면 절반으로 나뉘어져 3일치 먹이를 머금고 기다리던 일벌들이 일제히 쏴! 소리를 내며 밀물처럼 순식간에 소문을 빠져나와 새까맣게 주위 상공을 선회하며 여왕벌이 나오길 기다립니다.

평소엔 몸집이 커서 날 수 없지만 분가할 날이 다가오면 일벌들이 차츰 먹이를 줄여 주다가 하루 전엔 아예 굶겨 날 수 있게 된 날씬한 여왕벌은 맨 나중에 정든 집을 떠나 선회하며 기다리는 일벌들과 합류해서 자리벌이 미리 봐두었던 나뭇가지에 공처럼 뭉쳐 앉습니다. 그때 여왕벌은 내외를 돌며 여왕벌 물질을 발산하여 한 식구임을 다지고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이렇게 머무는 시간이 대략 2시간 정도이고 그때까지 주인이 새 벌통에 수용치 않으면 자리벌의 인도로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데 그때는 대략 4킬로미터 이상을 날아가 버리니 놓치고 맙니다.

일벌은 운 좋게 9월말쯤 태어나면 노역을 심하게 하지 않아 이듬해 4월초까지 살 수 있으니 6개월의 수명을 누릴 수 있지만, 대개의 일벌은 평균 60일을 살고 노역이 심한 봄철에는 40일밖에 살지 못합니다. 산란한 지 21일 만에 태어난 일벌은 꿀 한 모금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 맨 먼저 자기 몸을 단장하고 12일까지는 실내에서 노동 강도가 약한 소방청소, 육아, 왕유 공급, 선풍(날개로 습기 제거와 환기), 새집 짓기 등을 합니다. 체력이 붙으면 2~3일간 소문 밖을 나와 차츰 멀리 선회하며 집의 방향을 익히는 기억비행을 마치고 15일째부터는 청년벌을 따라 외역에 참여해 꽃가루, 꿀, 수액, 물을 실어 나릅니다.

꽃을 찾아 날 때는 시속 20킬로미터로 날고 먹이를 수집해 귀소할 때는 40킬로미터의 속도로 납니다. 그러니까 4킬로미터를 6분에 주파하는 셈입니다. 그들의 활동영역은 산지에선 반경 2킬로미터, 평지에선 4킬로미터까지 됩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 쇠약해지면 실내에서 경계업무(문지기)를 서며 외적의 위협에 과감히 몸을 던져 일침을 가하고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겨우 40~60일을 살고 가는 일벌의 아름다운 최후입니다.

꿀벌 나라에서 최장수하는 여왕벌은 16일 만에 태어나 3년을 살면서 매일 1천~2천개의 알을 낳아 종족보존의 가장 큰 일을 수행하면서도 왕의 권위를 부리거나 명령하는 일 따윈 하지 않습니다. 일벌들의 결정을 존중해 그대로 따릅니다. 심지어는 늙어서 산란율이 떨어지면 분가할 만큼 식구가 많지 않아도 일벌들의 뜻에 따라 왕안에 왕대를 산란하고 태어날 즈음엔 물려 죽거나 쫓겨납니다. 이런 수순을 번연히 알면서도 새 왕을 통한 종족보존을 위해 일벌들의 요청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년의 수명도 채 누리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하는 셈입니다.

수벌은 24일 만에 태어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며 체력만 강화하는 특권을 누리지만 처녀왕이 첫 교미를 위해 고공으로 비상(최고 200여 미터)할 때 따라 올라가 여왕벌과의 짧은 정사 후에는 음낭이 잘려 죽습니다. 종족 보존을 위해 죽음으로 임무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행(?)도 여왕벌을 따라 끝가지 올라간 오직 한 마리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이고 나머지 수벌들은 번식기가 끝나는 9월 말쯤에 역시 일벌들의 뜻에 따라 용도폐기되어 밖으로 쫓겨나 동가식서가숙 신세가 되어 처량한 최후를 맞습니다. 꿀벌 나라는 모계사회가 분명합니다. 일벌은 모두 암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꿀벌 나라는 여왕벌, 일벌, 수벌의 임무와 역할이 분명하며 서로의 영역을 절대로 침범하지 않습니다. 아사하면서도 종족 보존을 위해 끝내 왕의 먹이는 남기는 등 29가지의 일을 하면서 중요한 결정은 모두 일벌들이 하는 아름다운 소국입니다! "꿀벌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꿀벌민국의 주권은 일벌에게 있고 모든 권리는 일벌로부터 나온다!"

이제 벚꽃, 유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니 꿀벌민국의 융성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립니다.



   최 병상씨는 한국기독교농민회 총연합회 사무국장과 3대 지방의원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고향인 전남 무안군 몽탄면 학산리에서 쌀농사를 하며 꿀벌을 치는 농업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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