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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에 길게 누워
임철순 2009년 05월 18일 (월) 10:09:20
1주일 전인 지난 주 월요일, 치과에 가서 2시간 반 동안 진료를 받았습니다. 드르르, 지이잉…이런 소리를 계속 들으며 안간힘을 쓰다가 나중엔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무찔린 짐승처럼 도리 없이 길게 누워 있는 동안, 치과인생 50여년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데,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지금 치아가 어떤 상태기에 그렇게 오래 치료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습니다. 진료를 받는 도중 취득한 환자의 비밀을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몇 가지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내 치아에 대해서 나는 참 불성실하고 무심한 주인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친구와 부딪힌 순간 앞니가 조금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주 조금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든 누구에게든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습니다. 말해 봤자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시골에서 자란 나는 당시 치약은 구경도 하지 못했고, 소금이나 치분을 더러 쓰긴 했지만 이를 잘 닦지 않았습니다.

나는 토양설 풍토설을 굳세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잘 닦지 않은 잘못이 물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계룡산 기슭의 물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지요. 주민들 중에 반상치(斑狀齒)가 있었던 것도 그렇고, 중학교 들어가서 치아 검사를 받을 때 고향이 어디라고 댔더니 선생님이 “그러면 그렇지” 하던 것도 토양설 풍토설의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고향의 수질이 그런 판에 열심히 닦지도 않았으니 이가 나빠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20여년 전 이가 아프기 시작해 머리털 나고 난생 처음 스케일링이라는 걸 받았습니다. 나는 그 날 정말 창피했습니다. 하필이면 쭉쭉빵빵 늘씬하고 이쁜 간호사여서 그녀에게 더러운 입을 딱 벌리고 누워 있으려니 거의 죽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나의 이런 순정과 수줍음도 몰라 주고 “세상에, 어쩌면…” 이러면서 호미로 연탄 아궁이 퍼내듯, 달챙이 숟가락으로 누룽지 긁듯 박박 이를 긁어댔습니다. 그 무렵인지 그 전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지만, 화장실에서 칫솔질을 하는데 흔들리던 이 하나가 툭 떨어져 나왔습니다. 익을 대로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피도 한 방울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죽 치료를 받으러 다니지 않았으면 그리 됐겠습니까만 그 때도 속으로 ‘잘 났어, 정말’ 하고 말았으니 나는 정말 잘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때로부터 간헐적으로, 단속적으로, 주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치과를 드나드는 신세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이쁜 간호사라도 자신 있게 입을 딱 벌리고 눕고, 더러는 실없는 농담까지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입 벌리고 누운 채 코를 골기까지 해서 의료진을 놀라게 하는 정도가 됐습니다. 치과에 가면 왜 그렇게 늘 졸린지 모르겠습니다. 환기가 잘 안 되는 데다 소독약 무슨 약 이런 것들의 냄새가 뒤섞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다니는 치과의 원장님은 참 특이한 분입니다. 그가 인터넷으로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편하게 흉을 보겠습니다. 우선, 무슨 치과의사가 담배 하나도 못 끊나요? 그가 내 옆에 와서 앉으면 담배냄새가 확 풍깁니다. 나이 예순이 넘어 힘이 부치는지 진료를 하면서 헐떡헐떡 거칠고 가쁜 숨소리를 내 귀에 쏟아 붓습니다. 담배 때문이겠지만 가래 끓는 소리도 자주 납니다.

그러나 그런 건 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작 웃기는 일은 내가 신문사에 있다고 해서 그런지 입 딱 벌리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 뭘 묻는 것입니다. “이번에 대통령 누가 될 것 같아요?” “박근혜는 대체 왜 그런답니까?” 주로 이런 정치판에 관한 질문인데, 처음엔 못 들은 척 하다가 손을 들어 치료를 중지시키고 대꾸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 봤자 나는 그런 거 잘 모른다는 대답이었지만.

그러다가 언젠가는 “아니, 입 벌리게 해 놓고 말을 시키면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하고 짜증을 낸 적도 있습니다. 그 뒤에도 또 그러기에 얄미운 생각이 들어서 아래 윗니 사이에 교합지(交合紙)를 넣고 잘 맞는지 깨물어 보라고 할 때 모르는 척 그의 손가락을 깨문 일도 있습니다.

치과의사 여러분께는 참 안 된 말이지만, 나라면 절대로 치과의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좁은 진료실에서 남의 좁고 더러운 입 속을 들여다봐야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구강건강을 다룬 TV프로그램에서 더러운 입 속을 보여주면 나는 바로 고개를 돌리거나 채널을 돌려 버립니다.

치아건강을 오복(五福) 중 하나로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아가 가지런하고 희고 건강한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입 안이 석류 속 같고 박 속 같고 그래서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 그렇게 이가 좋은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자신있게 웃을 수 있겠지요. 해외여행을 할 때 본 어떤 스튜어디스가 기억납니다. 치열이 정말 가지런하고 얼굴도 깨끗하고 상큼했는데, 그녀가 말을 할 때면 입 안에 든 침도 맛있을 것 같은(이거 좀 심한 표현인가?)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녀의 이름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가 나빠지면 얼굴의 틀이 변하고 인상이 달라집니다. 지금은 치과의술이 눈부시게 발달해 다행이지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만 해도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돈이 있다 해도 뭘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겨우 하나나 두 개 남은 이로 오물오물 장시간 식사를 하시면서 고생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내 치아상태의 미래상은 어떤 노부부의 이야기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왜 그 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와 함께 침대에 누운 할머니가 남편에게 손을 잡아 달라, 뽀뽀해 달라, 귀를 깨물어 달라고 차례로 요구하자 할아버지가 말대로 다 해 주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 이야기 말입니다. “여보, 어디 가요?”그러니까 “틀니 가지러 가네”했다는 그 이야기.

흔히 하는 말이지만 이는 건강할 때 지켜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때는 늦으리, 후회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쏘아버린 화살이 아니라 빠져버린 이빨입니다. 이 악물고 살려 해도 이가 성해야 하고 남을 씹고 싶어도 이가 성해야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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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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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ekunkim (211.XXX.XXX.129)
임 선생님 너무나 흥미있게 읽었읍니다..아마도 저와 비슷한 처지인것 같아서인지요. 모쪼록 나머지 치아들 잘좀 부탁 드립니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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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5 13:3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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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완 (211.XXX.XXX.129)
쭉쭉빵빵 늘씬 간호사 있는 치과가 어디야. 나도 다음엔 그리로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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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10: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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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11.XXX.XXX.129)
대체, 그 침이 맛있을 거 같은 여자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임국장님은 이를 치료하시는 동안 술을 끊으시니 그게 다 섭리 아닌가 싶습니다. 상큼한 봄날 아침입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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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10: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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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182)
깨끗하고 가지런한 치아 하나로 누군가의 맘 속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니, 진작에 치아건강에 혼신의 정성을 다 할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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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0 20: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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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163.XXX.XXX.53)
어릴적 언젠가 치과에서 "이빨" ~~운운하다가 의사아저씨(?)께 된통 혼났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지금도 치과에 가면 절대 이빨이란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재밌는 글 항상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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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1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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