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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s a small world, is'nt it?"
 작성자 : 명선행자  2009-06-27 10:28:26   조회: 1635   
“It's a small world, isn't it?”
-비 오는 날 봉별逢別 의 수채화

“It's a small world, isn't it?” 또는 “O! what a small world it is!"
서양 사람들이 우연히 생각잖은 곳에서 친소간親疎間에 뜻밖의 사람과 만나서 손이라도 잡으며 하는 인사법이다. "당신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하는 반갑다는 뜻이 잔잔히 내포된 어감이다. 그러나 우리네 한국인들이 “참 세상 좁구먼!” 하며 사람을 만났다면 그 어감과 경우가 좀은 다르지 않을까.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움 끝에 발 끊고 돌아서서 담 쌓고 살던 옛 이웃이나 아이라도 업고 가는 첫사랑의 여인을 골목에서 맞닥뜨린 경우에 나오는 인사법이기가 십상이다.
그런데 오늘 등산하고 하산길에 친구들과 점심을 나누고 들어선 다방에서 그녀를 만난다. 첫 인사를 뭐라 할지 망설이다 “It's a small world!"라는 생각이 퍼뜩 먼저 떠올라서,
”참 세상 넓고도 좁구먼요!“
하고 ”넓고도“와 ”요“의 어미語尾를 달아 붙여 말 뜻을 부드럽게 궁글린다.
만개滿開한 목련의 사월, 밖에는 졸음같은 봄비가 추적거리는 오후.
셑트set에 들어와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 ‘액숀!’ 싸인은 떨어졌는데 대사臺詞를 까먹은 주연 배우들 처럼 대화 없이 서로 눈을 아래로 깔고 한참을 있다가 나온 말이 겨우, “지금 어디에 사시나요?”였든가 싶다.

그녀와 나는 국민학교 6년을 한 반에서 다니고 졸업한 동창생이니 오늘의 우연한 만남은 그냥 단출한 동창회 아니면 반창회班窓會쯤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덤덤할 수만 없는 작은 사연(?) 같은 게 있다면 있었다.
그래서 말문도 막히고 왠지 서로 쑥스럽고 부끄럽고 어색하고 그런 것이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다가 꼭 반 백년半 百年만의 해후邂逅.
작은 키와 가녀린 체구는 예전 국민학교 시절 그대로인 채 화려 하지도 초라 하지도 않게 창밖의 목련처럼 우아하고 곱게 늙어 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져 바로 전쟁 난리를 겪었고 서로의 안부 같은 것을 듣거나 묻거나 한 일 없이 6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그녀가 내게 어릴 적 소녀가 아닌 한 “여자”로 다가와 보인 것은 스무살 늦깎이 고삼高三 여름방학에 있엇던 첫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때였나보다.

“....동창회에 가서 부르려고 친구들에게 놀림까지 받으며 연습해 간 노래‘아! 목동아(O! Danny Boy)’ 를 ‘귀씨貴氏’에게 빼앗기고 당황하던 일.
더구나 그 2절은 저뿐 아니라 반 친구들도 모두 좋아서 즐겨 부르는 노래랍니다....”

방학후 학교로 돌아가서 받았던 그녀의 첫 편지 속 사연이었다.
그 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이 서로를 ‘귀씨’와 ‘귀양貴孃’이라 부르며 이런 동창회 후일담을 담은 편지가 두어 번 오가던 늦가을 어느 날, 그 앞 뒤는 기억이 나지 않고 그저 졸연猝然히,

“....어쩐지 오늘은 저 코스모스와 나 사이에 공통된 비애가 있는 것 같아 시선이 자꾸만 울밑으로 가는군요...”

하는 에둘러 말하는 암시적暗示的 고별사告別辭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고 그 뒤의 일은 감감 무소식으로 모르고 살다가 동창회 이후 오늘 꼭 오십년만의 이 만남이다.
그 때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는 있으면서 속으로 감춘 채 새침과 얌전을 빼며, 미처 사랑이란 말 같은 건 입 밖에 내거나 글로 적어본 적도 없거니와 그것이 소위 싹트던 ‘첫 사랑’ 비슷한 감정 같은 것이었던가도 확신이 없는 채로 가을의 코스모스를 보면 그녀가 내게 빼앗겨 아쉬워했다던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동안 혼자 허전한 아쉬움 비슷한 감정을 달래다가 그녀의 기억도 세월 속에 삭혀져 까맣게 잊고 살았더니라.
어렵게 말문이 트이자 꺼내는 얘기는 4녀 1남의 엄마로, 여덟 남매의 손자. 손녀를 거느린 할머니로, 시조모까지 모신 층층시하層層侍下 대가집 맏며느리로 자낸 시집살이 회고담이다.
하다 못해 국민학교 시절 풍금 소리에 맞추어 딱딱이를 치며 노래하던 음악시간 같은 아련한 추억담이라도 나누었어야 하련만 모두 다 삶의 무게에 눌려 잊어 버린 시간인 양 살아온 얘기가 앞을 서는 것인가.
쓴 커피 한 잔씩을 비우며 정말 묻고 듣고 싶었던 저간這間의 사연은 뒤로 밀리고 이런 밋밋한 얘기로 시간을 메우는 것은 어찌 보면 쑥스럽고 어색한 옛 마음을 지금에 와서 들키거나 내어 보이는 대신 일부러 보호막 같은 딴 얘기로 응얼진 속 마음을 가릴 줄 알만큼 우리는 너무도 점잖고 노회老獪하게 철이 들어 늙어버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런 담담무비淡淡無比한 시간 후 서로의 안녕을 교환하는 형식적 수인사修人事를 나눈 뒤 교회에 갈 시간에 맞춰 일어서는 그녀를 전철역까지 우산을 받쳐 바래다 주고 헤어진다.
마음에 남는 잔영殘影 같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줄 알고 덤덤히 헤어져 돌아서고 나서야 면전面前에선 생각 나지 않던 지난 날의 삽화들이 묵은 영화의 비오는 스크린처럼 명멸明滅하는 것은 웬일일까?

그녀를 만나러 갔던 교회당 문전
별 없는 밤 허전한 발길 돌리던
빙판 골목길엔 컹컹 개 짖는 소리
허행虛行의 빈 손 움켜쥐고
오스스 가슴 시리던 추위도,

잊으리라 모진 마음
반어법反語法 역설逆說로 바꿔 써서
우체통에 밀어 넣고
지우산 때리던 비바람 속 흙탕물 차며
옷 젖는 줄 모르고 걷던 길도,

바위 옷 주름진 삶의 무게에
꼬리 떼어 준 도마뱀처럼
모두 다 까맣게 잊어 버려
하얗게 지워진 줄 알고
그렇게 반 백년을 살다가

오늘, 봄비 칭얼대는 사월의 오후
일흔살 고운 목련으로 그녀를 만나
스쳐 지나도 알아 못 볼 타인들로 늙어 있어
풋풋한 스무살, 에둘러 어줍던
못다 한 말만 아쉬워 더듬다 말았구나

그렇다. 산 사람은 언젠가는 어떻게라도 만나게 되어있기 마련인가보다.
그러나 이런 잠간의 봉별逢別은 애별리고愛別離苦나 원증회고怨憎會苦의 앙금 같은 것 없이 인생행로에서 엇갈린 무연無緣한 사람끼리 옷소매를 스치고 지나치는 한 장 담담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것이 아닐까.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에 젖는 목련도 이 비 개이면 곧 꽃잎을 털고 이 봄도 가겠지. 세월이 지나가면 인생도 흘러가고.....
2009-06-27 10: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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